권정민 작가는 EBS에서 방송작가로 10년간 활동하다 34살에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방송작가 시절 제작에 참여한 프로그램으로는 시네마천국, 다큐프라임-이야기의 힘, 지식채널e 등이 있습니다. 대학시절 전공과는 담을 쌓고 미술 동아리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책에 종종 등장하는 명화 패러디 아이디어는 아마도 대학 동아리 시절 렘브란트, 뭉크 등의 명화를 따라 그리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디어부터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4년이나 걸린 첫 그림책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로 묵직하게 데뷔했습니다. 두 번째 그림책이 나오기까지도 또 3년이나 걸려서 “새 그림책이 기다려지는 우리 작가들”에서 언급한 열여섯 명의 작가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죠. 다행히도 두 번째 작품 이후로는 매년 한 권씩 새 그림책을 선보여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출간된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은 모두 다섯 권입니다.

  1.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보림, 2016)
  2.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문학동네, 2019)
  3.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문학과지성사, 2020)
  4. 엄마 도감(웅진주니어, 2021)
  5. 사라진 저녁(창비, 2022)

지금까지 나온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들의 특징은 부조화를 통한 자기성찰입니다. 글과 그림이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데 그걸 곰곰이 들여다보던 독자들은 작가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공감하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엄마 도감』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자연의 시각으로 우리 인간의 내면과 우리 사회의 모순된 단면을 들여다본다는 점입니다. 물론 『엄마 도감』 역시 자연이 아닌 아기의 시각으로 바뀌었을 뿐 화법 그 자체는 이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특징에 한 가지 더 얹어진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작가가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자연의 시선으로 모순되거나 부정한, 또는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인, 때로는 나약하고 절망적이기까지 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고발과 비판을 위한 게 아닙니다. 글과 그림 속에 녹아든 메시지를 잘 따라가보면 결국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변호하려 애쓰고 있는 작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저 변명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주변에 더 신경 쓰고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자는, 그래서 동식물들과 우리 인간들 모두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자는 조언이자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들 한 권 한 권이 우리 가슴에 묵직하게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 연민때문 아닐까요?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글/그림 권정민 | 보림
(발행일 : 2016/08/31)

살 곳 잃은 멧돼지 가족의 좌충우돌 도시 정착기면서 아직 사회에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한 청년들을 향한 위로와 응원이기도 한 그림책입니다. 모두 16개의 문장과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여섯 개의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세상살이에 대한 멋진 조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동물과 자연이 결국 우리의 공간을 도로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재치있게 담아낸 점이 이 그림책의 매력 아닐까요?

친구들을 초대해도 좋음!

무엇보다도 마지막 메시지가 인상적입니다.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면 그 다음엔 뭘 하면 좋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 친구들을 초대해도 좋음! 작가가 늘 잊지 않고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고!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리뷰 보기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글/그림 권정민 | 문학동네
(발행 : 2019/08/01)

데뷔작이라고 하기엔 워낙 강한 한 방이었던 탓에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권정민 작가의 마음 부담이 꽤 컸을 겁니다. 그래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었을 테구요.

늘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반려식물들의 이야기면서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한결같은 살뜰함으로 우리를 보살펴주는 반려식물들,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 그림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반려식물들의 시선입니다. 만약 사실주의에 치우친 채 세밀화만으로 그려냈다면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데 실패했을런지도 모릅니다. 사실적으로 그려낸 세밀화 사이사이에 숨겨진 의인화한 식물들의 눈. 때로는 놀란 듯, 때로는 걱정스러운 듯 우리를 지켜봐주는 다양한 그들의 눈길을 찾아 보는 재미 덕분에 훨씬더 정감 있게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림책 한 권이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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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글/그림 권정민 | 문학과지성사
(발행 : 2020/03/24)

지금까지는 살짝 느슨하게, 다정함도 조금 섞인 말투였다면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은 상대적으로 매우 신랄합니다. 글 한 줄 그림 한 장에 마음이 시리고 불편해질만큼 말이죠.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을 패러디한 마지막 장면 마저도 냉정합니다. 작가는 독자들을 거울 앞에 세웁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성찰의 시간이라고 다그치면서 말이죠. 물론 서운하진 않습니다. 절망이나 단절이 아니라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소 불편하더라도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울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뜻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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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도감

엄마 도감

글/그림 권정민 | 웅진주니어
(발행 : 2021/07/16)

지난 여름에 출간된 권정민 작가의 네 번째 그림책 『엄마 도감』. 모르긴 몰라도 가장 늦게 나왔지만 제일 많이 팔리지 않았을까 은근스레 짐작해 봅니다.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들 중에서 가장 그림책의 기본에 충실한 책이라는 점, 다른 책들과 달리 굳이 깊게 생각하거나 곱씹을 필요 없이 한 눈에 마음 속으로 쏙 들어오는 그림책이라는 점, 그리고 엄마 이야기라는 점에서 제 짐작이 틀리지 않을 거라 장담합니다.

네 번째 그림책마저 동식물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떤 이야기였다면 독자들은 조금 식상해 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권정민 작가 본인도 아마 그런 염려가 있었던 걸까요? 큰 틀에서는 지금까지의 화법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기발한 방식으로 풀어내서 자신의 독자들을 지켜낼 수 있는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독자들은 또 다음 작품을 설레며 기다릴 수 있게 되었구요.

방송작가 시절부터 다져진 철저한 자료 조사와 분석 능력은 『엄마 도감』에서 정점을 보여줍니다. 아기와 함께 태어난 ‘엄마’라는 신생인류, 아직은 밝혀진 것보다 밝혀내야 할 것이 더 많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기발하고 참신한 연구보고서 『엄마 도감』. 권정민 작가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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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저녁

사라진 저녁

글/그림 권정민 | 창비
(2022/11/18)

책표지 속의 엎어진 식탁은 들켜버린 내 마음 같습니다. 뜨끔해진 마음이 오갈 데를 모르고 허공을 헤맵니다. 이 그림책을 읽은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휴대전화를 켜고 배달 앱을 열고… 터치 터치 터치! 몇 번의 터치 후에 음식을 고르고 나면 어느새 내가 시킨 음식이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립니다. 누구를 마주할 필요도, 말 한 마디 나눌 일도 없습니다. 요즘 우리 대부분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주문서대로 모든 게 착착착 규격에 맞추어 포장이 되고 현관문 앞에 놓이면 문밖으로 빼꼼, 고개만 내밀면 되었죠. 그렇게 매일매일 모든 음식들이 코앞까지 배달되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밀려드는 주문에 재료를 다듬을 시간조차 없었던 식당에서는…

죄송합니다.
요리할 시간이 없어서요.
직접 해 드세요!

살아 있는 돼지 한 마리를 아파트 앞에 통째로 배달하고는 가버립니다. 이제부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전작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작가가 그려낸 또 하나의 통렬한 자기 성찰서(인간 성찰서?) 『사라진 저녁』. 나약하고 절망적이면서 폭력적이기까지 한 우리 삶의 불편한 진실들, 우리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자고 이야기하는 그 따갑고 묵직한 회초리가 그래서 눈물 나고 그래서 또 기껍게 느껴집니다.

『사라진 저녁』 리뷰 보기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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