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저녁

사라진 저녁

글/그림 권정민 | 창비
(2022/11/18)


엎어진 식탁은 들켜버린 내 마음 같습니다. 뜨끔해진 마음이 오갈 데를 모르고 허공을 헤맵니다. “사라진 저녁”을 읽은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휴대전화를 켜고 배달 앱을 열고… 터치 터치 터치! 몇 번의 터치 후에 음식을 고르고 나면 어느새 내가 시킨 음식이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립니다. 누구를 마주할 필요도, 말 한 마디 나눌 일도 없습니다. 요즘 우리 대부분의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건 그 아파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아파트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어.

사라진 저녁

주문서대로 모든 게 착착착 규격에 맞추어 포장이 되고 현관문 앞에 놓이면 문밖으로 빼꼼, 고개만 내밀면 되었죠. 그렇게 매일매일 모든 음식들이 코앞까지 배달되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밀려드는 주문에 재료를 다듬을 시간조차 없었던 식당에서는…

사라진 저녁

통째로 요리 재료를 배달했어요. ‘요리도 안 된 저녁’이 아파트 앞에 배달 된 거예요. 줄에 묶여있는 돼지 엉덩이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요리할 시간이 없어서요.
직접 해 드세요!

그날 904호는 족발을 시켰고, 805호는 감자탕, 702호는 돈가스, 603호 보쌈, 501호는 김치찌개를 시켰거든요.

처음에 ‘돼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하고 생각했던 주민들은 우선 돼지를 숨기기로 마음먹었어요. 행여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이상한 소문이 나면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사라진 저녁

돼지를 숨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배달노동자의 힘을 빌려 식사의 수고를 덜었던 주민들은 이제 청소노동자와 경비노동자의 수고를 빌리기로 했어요. 돼지를 힘겹게 끌고 나가려는 경비원 아저씨의 일부 모습은 화면 밖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고 뒤처리를 하고 있는 청소 아줌마의 물걸레에서 흐른 물이 화면 밖으로 뚝뚝 흐르고 있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주민들은 다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더럽고 위험하다는 듯이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돼지 덕분에 한자리에 모인 주민들은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돼지를 요리할 계획을 세웠어요. ‘돼지 한 마리’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돼지를 씻기 위한 라텍스 장갑,  천연모 세척솔, 다용도 호스, 비건 인증 세제, 돼지를 잡을 때 쓸 돼지몰이판, 코 보정기, 우레탄 망치, 그리고 ‘돼지 잡아 보신 분 우대’ 긴급 구인 광고지도 붙입니다. 잡은 돼지를 부위별로 나눌 때 필요한 전문가용 칼,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할 바비큐 그릴, 양념 붓과 집게에 각종 소스, 유기농 채소까지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이제 남은 건 터치 터치 터치!!! 두 눈이 벌게지도록 검색과 터치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의 모습이 비쳐 보여 민망하고 부끄러워집니다.

동이 트기도 전에 도착한 물품들로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는데 들떠 주민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돼지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천장에 가득 띄워놓은 풍선은 주민들의 두둥실 한껏 들뜬 마음입니다. 만찬을 차릴 커다란 식탁이 차려지고 마침내 화려한 숯불이 커다랗게 타오르는데…. 불길을 화재로 감식한 스프링클러가 작동을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바비큐 파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지요.

그러는 사이 돼지는 사라져 버렸어.

이야기는 표지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저녁으로. 그래서 이 그림책 제목은 “사라진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이야기는 뒤표지로 이어지니 뒤표지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이상한 나라의 그림 사전” 등의 그림책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권정민 작가가 그려낸 또 하나의 통렬한 자기 성찰서(인간 성찰서?) “사라진 저녁”. 나약하고 절망적이면서 폭력적이기까지 한 우리 삶의 불편한 진실들, 우리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자고 이야기하는 그 따갑고 묵직한 회초리가 그래서 눈물 나고 그래서 또 기껍게 느껴집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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