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살이 되면

백 살이 되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
엄마가 불러도 깨지 않고
아빠가 흔들어도 깨지 않고
모두 그렇게 떠나고 나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좋겠다
물방울이 풀잎을 구르는 소리
젖은 참새가 몸을 터는 소리
이불 속에서 듣다가
나무가 된다면 좋겠다

봄비 내리는 날, 유리창을 통해 짙어진 숲을 바라보는 듯한 그림책입니다. 묽게 갠 유화 물감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표현은 바쁜 일상에 바싹 타 들어갔던 마음까지 촉촉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봄비 소리를 듣다가 스르륵 다시 잠에 빠져들 것 같은 평안한 그림책입니다.

책장을 넘기면 우리도 주인공을 따라 잠옷을 입은 채 숲을 거닐게 됩니다. 그 촉촉한 숲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묵혀 온 한숨을 돌리는 것이죠. 참새가 털어내는 시원한 물방울까지 얼굴에 와닿는 듯한 개운함입니다.

그렇게 숲에서 한참을 헤매다 깨어나도 여전히 한낮이길 바랍니다. 나에게 잘 잤냐고 인사를 건네는 다정한 가족들이 있길 바랍니다. 그러면,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백 년 동안 쉬어서 아주, 기분이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쉼이기를 말이죠.

기분 좋게 내리는 봄비처럼 말갛게 그려낸 유화, 깊고 부드러운 휴식 같은 오일파스텔, 담백한 색연필 선이 참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백 살이 되면

백 살이 되면

그림 서수연 | 글 황인찬 | 사계절
(2023/04/05)

‘백 살이 되면 좋겠다’로 운을 떼는 시는 몽환적인 그림과 만나 아주 긴 휴식을 이야기합니다. 서수연 작가는 평화로운 잠과 그 잠에서 깨어난 말간 얼굴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가 본 적 없는 숲이지만 편안하고, 꿈이지만 생생한 느낌이 듭니다.

긴 휴식에 공감 가는 이유는 ‘더 자고 싶다. 푹 쉬고 싶다…’하며 시작한 아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아침일 수도 있고요. 그럴 때 이 그림책은 “당신이 잘 쉬었으면 좋겠다”라는 더없이 촉촉한 응원이 되어줍니다.

거리의 나무, 풀, 등교하는 아이들, 출근하는 어른들까지. 저마다 커가느라 바쁜 하루에도 숨 돌릴 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쉼은 나약한 것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이란 인식이 더 당당해지면 좋겠습니다. 휴식에 대한 따뜻한 바람이 담긴 황인찬 시인의 시와 서수연 작가의 맑고 편안한 그림이 잘 어우러진 시 그림책 『백 살이 되면』이었습니다.

백 슬기

침대맡에 그림책을 두는 사람.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며 살고 있고, 가온빛에서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이 사람들에게 꽤 힘을 주고, 퍽 기억에 남기를 소망합니다. | skpaik100@naver.com | 인터뷰 보기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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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수
홍선수
2024/04/17 19:38

오늘 나에게 꼭! 절실이! 필요했던 쉼….그 쉼표 하나!

아스름한 봄비 그림에 한번!
깊고 부드러운 휴식같은
글에 또 한번!
콧끝이 찡해오는 그림책 소개
감사합니다^^

오늘에 난 쉼표 하나….

백승진
백승진
2024/04/17 20:13

쉼이 있는 삶이 모두에게
펼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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