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닥닥 기사

후다닥닥닥 기사

(원제: Le Chevalier de ventre à terre)
글/그림 질 바슐레 | 옮김 나선희 | 책빛

(2023/02/20)


화려하면서도 디테일한 그림 속에 유머와 철학을 담은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 질 바슐레는 1952년생 프랑스 작가입니다. 재미와 의미 모두 갖춘 그림책들을 꾸준히 내놓는 작가이니 질 바슐레의 그림책들 놓치지 말고 챙겨보세요.

“후다닥닥닥 기사”에는 달팽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표지 그림에 나오는 달팽이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후다닥닥닥 기사예요. 느림의 상징인 달팽이와 후다닥닥닥이란 말의 부조화에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원서 제목인 ‘Le Chevalier de ventre à terre’의 ‘ventre à terre’이 매우 빠르다는 뜻입니다. 달팽이 나라에서 가장 빠른 기사일까? 행동이 아니라 성격이 급하다는 뜻일까? 달팽이 기사에게 매우 빠르다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하며 그림책을 펼쳐봅니다.

후다닥닥닥 기사

수탉의 첫 울음소리에 후다닥닥닥 기사가 잠에서 깨어나며 소리쳤어요. 서둘러야 한다고. 어제저녁 물렁더듬이 기사가 자신의 딸기밭에 쳐들어왔다고. 그러니까 후다닥닥닥 기사의 땅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언제? 어•제•저•녁•에!

그럼에도 자신의 집에서 한숨 푹 잘 자고(?)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후다닥닥닥 기사. 둥근 달팽이 껍데기에 딱 맞게 설계된 침대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이토록 포근한 침실이라니… 살짝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푹 자고 일어났으니 최적의 컨디션으로 전쟁터로 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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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과정이 너무나 디테일하고 꼼꼼해 다시 웃음이 빵 터져버렸습니다. 침대에서 간단히 먹는 아침이라기엔 엄청난 성찬을 먹고 후다닥닥닥 기사는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합니다(신문까지 꼼꼼히 챙겨 보면서), 운동을 마쳤으니 이제 씻어야겠죠. 한동안 제대로 씻지 못할 것을 대비해서인지 등 껍데기까지 아주 꼼꼼하게 닦고 난 후 비장한 모습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습니다. 투구 눈구멍으로 달팽이 두 눈이 쏙 나와 웃음을 안겨주네요.

이제 전쟁터로 나가나 싶었는데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페이스북을 연상시키는 종이 앞에 앉아 친구들의 글에 일일이 좋아요 표시 손을 그리며 답장을 보냅니다. 그렇게 할 일을 마친 후 포부도 당당하게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아, 아이들을 깜빡할 뻔했습니다.

아이들 방에 들러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보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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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에게 뽀뽀하는 걸 잊을 뻔했어요.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뽀뽀하는 달팽이 기사의 스윗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마음이 말랑말랑해집니다. 완전무장을 한 채 뒤돌아서서 아내에게 작별의 아쉬운 마음을 전하는 로맨틱한 모습이라니.

장면 장면이 따뜻하고 다정해 오래오래 눈길이 머물게 됩니다. 그 바람에 전쟁이라는 급박함은 잠시 잊고 있었어요.

후다닥닥닥 기사

도시락과 물컵까지 꼼꼼하게 챙겨 전쟁터로 가는 길은 또 얼마나 험난한지. 성에 갇힌 라푼젤을 도와주고 길 잃은 빨간 모자에게 길 안내를 하고 (저 멀리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도 보이고 이상한 나라의 리스에서 물담배 피우는 애벌레도 보입니다), 영화 <제7의 봉인>에 나오는 죽음과 체스 대결도 벌이고 트라야누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긴 트라야누스 원주처럼 버섯 원기둥에 원정 상황을 상세하게 새겨 넣기도 합니다.

후다닥닥닥이라는 이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느긋하고 꼼꼼하고 철저하게 일 처리를 하는 기사를 보면서 그 순간들을 함께 즐기다 보니 어느덧 전쟁터에 도착했습니다. 아참 전쟁이 터졌던 거였지 새삼 깨달으면서요.

수많은 군사가 양편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치 중입니다. 무슨 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후다닥닥닥 기사와 물렁더듬이 기사는 선언을 합니다.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자세히 다시 보니 양쪽 기사들뿐만 아니라 대치 중인 군인들도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전쟁에 나섰네요. 🤣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전쟁을 할 수야 없겠죠. 저희 엄마가 늘 그러셨어요. 건너뛴 한 끼는 평생 다시 찾아먹을 수 없다고. 넓고 푸른 풀밭 위에 수많은 군사들이 함께하는 점심 식사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전쟁터인지 축제의 장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요. 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웃음 폭탄을 안겨주니 끝까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풍성하고 재미난 이야기 속에 토미 웅거러의 “세 강도”, 질 바슐레 자신의 작품인 “보세주르 레지던스”의 유니콘, 데이비드 맥키의 “알록달록 코끼리 엘머”, 아기 코끼리 덤보, 개구리 왕자 등 세밀하게 숨어있는 그림까지 찾아볼 거리가 가득 숨어있는 그림책 속 그림은 질 바슐레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멋진 선물입니다.

그리고 정말 멋진 선물은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지요.

교훈

인생에서
내일로 미룰 일은 많다.
그러나 달콤한 뽀뽀는 미루면 안 된다.

달팽이 끈적한 침으로 온 가족이 끈끈하게 연결된 후다닥닥닥 기사 가족의 뽀뽀, 오늘 잊은 뽀뽀는 평생 다시 찾을 수 없으니 늘 사랑하고 살아가라고, 그 사랑을 부끄러워 말고 보여주고 표현하면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후다닥닥닥이라는 이름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네’하면서 웃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우리 기준에서나 느리다고 여겨질 뿐이지 어쩌면 달팽이 나라에서는 놀라운 속도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물렁더듬이 기사가 ‘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네’ 하고 속으로 깜짝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름이 후다닥닥닥 기사일지도.

어쩌면 작가 질 바슐레는 “후다닥닥닥 기사” 속에 수많은 그림들을 숨겨놓고 무리해서 달려가느라 보지 못했던 것, 놓친 것들을 세세히 살피고 가라며 우리를 붙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속도를 바꾸면 보입니다. 내 가족이, 그 마음이, 온 세상이… 모든 걸 다 미루어도 달콤한 뽀뽀만큼은 절대 미루지 마세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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