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나무처럼

글/그림 이현주 | 책고래
(발행 : 2016/04/15)

2016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예전에 살았던 오래된 아파트는 여름이면 가장 먼저 매미 소리가 계절을 알렸고 늦가을이 돌아오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며 넓은 화단에서 멋진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늦가을 풍경 속에 서있자면 왠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하늘마저 가릴 정도로 높게 자란 은행나무들을 올려다 보면서 나무를 향해 경외감을 갖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 곳에 살던 시절을 돌아보면 늦가을 멋진 정취를 자아내던 은행나무가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그림책 “나무처럼”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어요.

우뚝 솟아 있는 나뭇가지 사이사이 작은 새들이 놀고 있습니다. 굵직한 가지마다 나뭇잎을 가득 달고 있는 나무가 듬직하게 느껴지네요. 높게 자란 나무처럼 세로로 쓴 제목도 인상적입니다. “나무처럼”이라는 그림책 제목에서도 깊이감과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나무처럼

나무가 어느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열 살 때였어요. 자그마한 나무가 옮겨지고 있는 모습을 담장 위 고양이도 지켜보고 있네요. 처음 나무가 이사왔을 때는 키가 아파트 1층 높이만 했어요. 일층에는 피아노 교습소가 있었는데 날마나 새들과 고양이와 함께 아이들의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처럼

열 네살이 되어 훌쩍 자란 나무는 이층집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어요. 창 밖 나무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아저씨 덕분에 나무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그것은 몹시 기쁘고 설레는 감정이었어요.

나무처럼

경비 아저씨가 가지치기를 할 때는 너무 아팠지만 아저씨가 가지를 자를 수록 나무는 키가 더 쑥쑥 자라납니다. 그래서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나무는 콩이 가족이 사는 삼층까지 키가 자랐어요. 콩이는 다섯 마리 강아지의 아빠입니다.  화목해 보이는 콩이네 가족을 바라보며 나무는 그 시간이 참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흩날리는 노란 은행나무 아래 알콩달콩 콩이네 가족과 콩이 주인 가족의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입니다.

나무처럼

사층 아파트 높이로 자란 것은 나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어요. 사층 할머니는 어둠이 가득한 곳에서 늘 가족사진을 보며 홀로 앉아 있었죠. 그 모습은 나무를 슬프게 했어요.

스물다섯 살이 된 나무는 아파트 꼭대기 층에 닿을 만큼 자랐습니다. 하지만 텅 비어있는 그곳은 긴 그림자만이 나무를 반길 뿐이었어요.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 나무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무처럼

나는 어디까지 자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나무처럼

시간은 어김없이 지나갑니다. 고독한 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아침이 밝아오기 마련이죠. 밤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아파트 지붕 위로 쭉 뻗은 순간 마주하게 된 것은 오래된 아파트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른 나무들의 인사소리였어요. 아파트 풍경 너머에는 파랗게 반짝이는 새잎을 달고 있는 다른 나무의 모습도 보이고 담위를 살금살금 걷고 있는 고양이 가족의 모습도 보입니다.

오래된 아파트 너머에서
나무들의 인사 소리가 바람을 타고 건너와
가지 끝에 머물렀습니다.
나는 우리 동네 은행나무입니다.

낡은 아파트에 자리잡은 어린 은행나무가 자라면서 만나는 1층부터 5층까지 층마다 제각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서 우리 삶의 단편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일층 피아노 교습소에서 본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 자신이 하는 일에 흠뻑 빠져 살고 있는 이층집 화가 아저씨의 모습, 그리고 가지치기 후 성장통을 앓고 난 뒤 훌쩍 자란 나무가 본 것은 삼층에 살고 있는 강아지 콩이와 그 가족의 행복한 모습입니다. 사층 높이에 이르렀을 때는 어둠이 가득한 곳에서 가족 사진을 껴앉고 홀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납니다. 그리고 텅 비어있는 꼭대기층에서는 긴 그림자만이 나무를 반길 뿐이었죠.

싱그럽고 풋풋했던 시절을 지나  꿋꿋하게 성장한 나무,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꿈꿨던 삶, 하지만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자신 혼자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텅 비어있는 상태로 남아있게 되죠. 앙상하게 남은 가지만으로 춥고 고독한 겨울을 보내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감당해내야만 하는 나무의 삶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보이네요. 이제 불꺼진 아파트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나무, 삶의 끝은 이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걸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가지를 아파트 지붕 위로 쭉 뻗은 나무가 만난 것은 아파트 너머의 넓은 세상이었어요. 그리고 그제서야 나무는 멀리 다른 나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나무가 본 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  함께’라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미의 하얀 캔버스”로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력을 거침없이 보여준 이현주 작가의 신작 “나무처럼”은 크고 작은 경험과 다양한 감정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은행나무의 이야기로 우리의 삶을 진지하면서도 깊이감 있게 보여줍니다.

삶은 둥글게 순환합니다.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죠. 나무가 바라보는 풍경을 통해 그 이야기를 간결하고 정돈된 문장과 아름다운 그림으로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보여주는 그림책 “나무처럼”이었습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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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room
2016/05/21 23:34

동화책마다 핵심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매번 다른 표현을 만나 감동하고 또 살짝 반성하게 되네요. 언뜻 쉬워보이면서도 정말 어려운게 동화책인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이번주 금요일도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알도
2021/01/19 11:56

신혼때 4층에서 살았는데 이 책처럼 사계절 내내 나무의 변화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던 기억이 이책을 보면서 새록새록 떠올라서 너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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