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이

그러나 줄은 더욱 단단히 목을 조이고 끌려 들어갈 차례는 점점 더 다가올 뿐이었다. 우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던 칡소의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려움에 질려 말라 버린 목구멍에서는 간신히 쇳소리만 나왔다.

도축장의 기계톱 소리 앞에 끌려 나온 두 살배기 칡소 칠성이. 잔혹한 기계음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은 어린 소를 자신도 모르게 울게 만들었고 살고 싶다는 간절함은 숨통을 조이듯 목구멍을 바짝 마르게 합니다. 굵직한 눈망울 속에 담긴 두려움,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생존에 대한 절박한 열망이 몇 해 전 아끼던 범소를 잃은 뒤 한동안 싸움소를 키우지 않았던 황 영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칠성이와 황 영감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황 영감은 칠성이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었고, 칠성이는 황 영감에게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칠성이의 두려움, 새로운 만남과 시작에 대한 황 영감의 두려움, 결국 두려움이 칠성이와 황 영감을 이어준 셈입니다.

칠성이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도축장의 두려움은 없어진 게 아니라 칠성이의 깊은 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노였고 또 다른 힘이었다. 뜨거운 힘이 꾸역꾸역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식처럼 정성스레 돌봐주는 황 영감 덕분에 몇 해 지나지 않아 칠성이는 훌륭한 싸움소로 성장합니다. 한 체급 한 체급 올려가며 전성기를 향해 내닫는 칠성이의 심장 속에 더 이상의 두려움은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였는데…

모두가 최고라 인정하는 싸움소 천하를 먼 발치에서 마주하게 된 날 칠성이는 자신의 깊은 속 어딘가에서 고개를 쳐드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도축장의 것과는 결이 다른 두려움입니다. 기계톱 소리 앞에서 몸서리 치던 날의 두려움이 절망의 공포였다면 지금의 두려움은 이기고 싶은 충동이 불끈대는 분노입니다.

훈련하지 않는 날이 늘기 시작했다. 칠성이는 입맛을 잃었다. 소는 주인의 생각을 말보다 감정으로 이해하는 동물이라 황 영감의 슬픔을 고스란히 떠안았고,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쩌면 모든 게 이대로 끝날 수 있다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천하를 이겨내고 싶은 칠성이의 분노 앞에 수많은 싸움소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태백산이라는 싸움소. 천하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태백산만 이겨내면 모래판에서 천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태백산이란 놈은 자신을 키워준 황 영감이 지난 날 자식처럼 여겼던 범소를 죽게 만든 녀석이었습니다. 칠성이와 태백산이 맞붙던 날 황 영감을 엄습했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하를 향한 칠성이의 두려움 서린 분노가 태백산을 향해 폭발한 겁니다. 싸움을 포기한 태백산이 고개를 돌리고 도망을 쳤지만 칠성이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기어코 쫓아가 자신의 옥뿔을 패자의 목덜미에 박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범소를 잃었던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번에는 거꾸로 자신이 키워낸 칠성이가 상대방 싸움소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황 영감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입니다. 그로 인해 황 영감이 겪는 아픔을 칠성이는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고, 이제 칠성이는 새로운 두려움을 직면합니다.

도축장의 참혹함 속에서 칠성이의 깊은 속 어딘가에 새겨진 두려움은 칠성이를 강해지게 했고 누구건 이겨내게 해주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황 영감의 슬픔은 그 위에 새로운 두려움을 새겨넣었습니다. 분노, 승리에 대한 갈망, 두려움에서 비롯된 자신의 속에서 꿈틀대는 그 힘을 다스리지 못하면 소중한 사람, 자신의 유일한 가족 황 영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칠성이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배기를 오르내리고, 아름드리 참나무를 들이받다 끝내는 쓰러뜨리고, 바위마저 끌고 다닌 힘으로 천하와 맞섰다. 천하를 물리쳐야만 진짜 싸움소가 된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최강의 싸움소 천하와의 결전의 날.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채 도망치는 태백산을 향해 폭주하던 강하기만 하던 칠성이는 더 이상 없습니다. 싸움소들의 성난 기운 가득한 모래판은 더 이상 칠성이를 흥분시키지 않습니다. 이제 칠성이에게 싸움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천하가 복종하는 순간, 칠성이는 속이 터져라 외쳤다.
도축장의 두려움을 향해,
단 하나의 가족 황 영감을 향해.

“엄무우우우우!”
“나는 칠성이다!”


칠성이

칠성이

황선미 | 그림 김용철 | 사계절
(발행 : 2017/06/28)

2017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칠성이”는 도축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어린 칡소 칠성이가 진짜 싸움소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통해 살갗을 찢어내듯 아프고 치열한 삶의 현실을 느끼고, 황영감의 깊은 한 숨 속에서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계의 소중함을 엿볼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황선미 작가의 글 자체만으로도 매우 뛰어난 단편 소설로서 전혀 손색이 없고, 우리 전통 소싸움을 그려낸 김용철 작가의 그림만 따로 전시회를 열어도 모자랄 것이 전혀 없을만큼 글과 그림 모두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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