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글/그림 이지현 | 이야기꽃
(발행 : 2017/03/09)

2017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수영장”을 쓴 이지현 작가의 신작이라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앞섭니다. 한참 동안 유쾌하고 신나는 그림들로 가득한 책표지를 들여다보며 그림책과 눈인사부터 나눕니다. 그러고 나서 작은 문을 열듯 살포시 페이지를 넘겨 그림책 세상으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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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벌레 한 마리가 낡은 열쇠 위에 앉았다 날아가는 것을 본 한 아이가 열쇠를 주워들고 벌레를 따라갑니다. 흑백의 세상, 무언가 잔뜩 마뜩잖은 표정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색깔을 지닌 작은 날벌레는 눈에 쏘옥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봐요. 누구 하나 아이나 날벌레에게 눈길을 주는 법이 없어요. 색상도 소리도 없는 이곳은 지루한 무성 영화 속 세상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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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벌레는 낯선 문 속으로 들어갔어요.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거미줄투성이의 낡은 나무 문, 한 번도 열린 적 없어 보이는 문 앞을 서성이던 아이는 조심스럽게 길에서 주운 열쇠를 자물쇠에 넣어봅니다.

딸깍- 문이 열리자 문 안쪽에 좀 전의 날벌레가 보여요. 아이는 문 안쪽 세상으로 선뜻 들어섰어요. 그렇게 들어선 세상은 밝은 빛깔 색깔로 가득 차 있어요. 분명 바깥쪽에선 아무런 색채가 없었던 문도 안쪽에서 보니 따뜻한 갈색을 띠고 있구요. 바깥쪽에서 문을 둘러싸고 있던 겹겹의 거미줄도 문 안쪽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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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그곳에서 누군가와 부딪쳤어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낯선 모습을 한 사람을 보고 아이는 그만 도망치고 말았어요. 이전에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 알지 못하는 언어를 하는 낯선 모습의 사람과 만난 아이는 혼란과 두려운 마음이 앞섰을 거예요. 누구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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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 낯선 사람을 피해 달아나던 아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가족들과 행복한 식사를 합니다. 쓰는 말도 다르고 생김도 다르지만 아무 의심 없이 아이를 환영해주는 가족들, 초록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아이 역시 처음의 혼란스러움을 잊고 그들 세상에 동화되어 갔어요. 그러는 사이 무표정이었던 아이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감돌고 무채색이었던 아이에게도 자연스럽게 색상이 생겨납니다. 화사한 살구 색상으로 물든 얼굴, 빨간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아이 표정이 밝고 환하게 빛이 납니다.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즐겁고 유쾌한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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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는 더 많은 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제각각 문에서 나온 생김도 피부색도 모두 다른 이들, 하지만 서로 다르다고 상대방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경계하지 않아요. 그저 만나면 즐겁게 웃고 인사하며 어울릴 뿐… 아이 역시 이 곳이 낯설고 불편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이 곳에 있었던 이처럼 자연스럽게 이 순간을 즐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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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늘은 누군가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각자 다른 문에서 나온 신랑과 신부는 모두의 축하 속에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고 이들과 어울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아이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이에게서 돌려받은 열쇠를 들고 자신이 왔던 세계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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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똑같은 문을 통과한 아이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어요. 제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이는 더 이상 흑백의 생기 없는 아이가 아닙니다. 빨간 줄무늬 셔츠를 입은 살구색 얼굴에 발그스레한 뺨과 빨간 입으로 싱긋 웃으며 문을 돌아보는 아이 뒤쪽으로 열려있는 나무 문, 아이는 그 문에 열쇠를 꽂아두고 돌아옵니다. 여전히 무채색이지만 아이가 한 번 지나갔던 문에는 거미줄이 걷혀있어요. 그 문은 이제 누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문이 되었어요. 물론 저쪽 세상에서 이쪽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는 문이 될 수도 있겠죠.

그 문을 통과해 드나드는 이가 또 생길 거예요. 흑백의 세상에서 색채의 세상으로… 색채의 세상에서 흑백의 세상으로…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한다면 언젠가는 문 이쪽 세상 역시 밝고 화사하게 변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봅니다.

하나의 가능성의 문을 담은 그림책 “문”, 책의 문을 펼치는 순간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이 열리는 놀라움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이 행복해지는 그림책입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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