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책표지 : Daum 책

글/그림 이수지 | 비룡소
(발행 : 2017/11/03)

2017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여백이 많은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하얀 여백이 가득한 표지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빨간 장갑에 빨간 털모자를 쓴 소녀, 이제 막 도약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에요. 요정처럼 하얀 빙판 위를 내달리던 김연아 선수가 저런 포즈를 취하면 나도 모르게 긴장해 두 손을 불끈 쥐곤 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림책이 접히는 경계를 기준으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멋지게 그려낸 이수지 작가의 전작 경계 그림책 시리즈 “파도야 놀자”,“그림자놀이”, “거울 속으로”처럼 그림책 “선” 안에도 현실과 환상 세계를 가르는 경계가 숨어 있어요. 표지 그림에도 그 경계가 아주 절묘하게 숨어있답니다. 표지 그림에서 스케이트 소녀가 신나게 얼음판을 지치고 있는 곳은 매끄러운 코팅 처리를 해 빙판 느낌이 나게 표현했고요. 스케이트 날이 만드는 어지러운 선을 그리고 있는 연필이 있는 쪽은 코팅 처리가 되지 않아 하얀 도화지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어요. 연필을 쥐고 있는 쪽이 현실이라면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쪽은 현실이 그려낸 환상이겠죠.

텅 빈 도화지 위에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하나가 놓여있는 면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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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를 지치며 중앙 무대로 소녀가 들어옵니다. 아래로 쭉 내려 그은 선 하나에서 탄생한 스케이트 소녀, 처음에는 긴장한 듯 무표정이었지만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어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하얀 공간 위에 흔적이 남습니다. 때로는 가는 선으로 때로는 굵은 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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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위에 그려진 여러 개의 선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소녀의 동작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상에 몰입한 소녀, 온몸으로 리드미컬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연주에 심취한 지휘자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요. 넓고 매끄러운 빙판 위에서 소녀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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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경쾌하게 빙판 위를 가르던 소녀가 드디어 멋지게 도약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힘차게, 누구보다도 더 높이,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시원하게 도약한 소녀, 이제 남은 것은 성공적인 착지뿐이죠.

하지만 곧이어 위기가 찾아왔어요. 공중에서 빙판 위로 두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러지며 무대 가장자리까지 밀려간 소녀는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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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미끄러지고 맙니다. 저만치 날아가 떨어진 빨간 모자, 지금껏 소녀가 빙판 위에 그려낸 수많은 아름다운 선들은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소녀의 마음처럼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그와 동시에 커다랗고 하얀 스케이트 무대 한쪽에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경계 하나가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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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이 구겨긴 채 내팽개쳐 있습니다. 망쳤어, 다 끝났어, 수십 번 그리고 이리저리 지운 흔적들, 소녀처럼 연필도 지우개도 종이도 나뒹굴고 있습니다. 소녀의 아픔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걸까요? 아름다웠던 꿈은 실패한 그 자리에 구겨진 채로 갇혀 이대로 영영 끝난 걸까요?

구겨진 종이가 다시 펴집니다. 구깃구깃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빙판 위에 넘어진 소녀가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떨군 빨간 모자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어요. 물끄러미 빨간 모자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여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그 눈빛, 달려가 토닥이며 그 마음 가만히 달래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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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소녀 뒤로 누군가가 미끄러지며 등장합니다. 소녀만 존재했던 빙판 위에 새롭게 등장한 소년, 소녀가 고개를 들어 미끄러지고 있는 소년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쭈욱 미끄러져 들어오는 소년의 표정이 무언가 달라 보여요. 미끄러지는 이 순간도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에요. 경계가 사라진 이곳은 다시 완벽한 빙판이 되었습니다. 소녀의 모자와 목도리를 빼고 무채색이었던 이곳에 색채를 지닌 소년이 등장하면서 빙판 위에 서서히 색채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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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것은 소녀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소녀의 주변으로 여기저기 미끄러지면서 그 순간 마저 즐기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 발라당 넘어지는 순간에도 깔깔 웃고 넘어진 채로 미끌미끌 팔다리를 흔들며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처럼 소녀도 이제 마음 편하게 웃어봅니다.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지운 고민의 흔적들은 수많은 아이들이 즐겁게 얼음을 지치고 놀았던 흔적이 되었습니다.

손 내미는 소년의 손을 잡고 소녀도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소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빙판 위에 즐겁게 놀고 있는 모두가 친구이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두가 무대 위의 주인공입니다. 모두가 함께하는 그곳은 더 이상 외로운 곳도 쓸쓸한 곳도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하얀 도화지 위에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있을까요? 종이 위에 무엇을 그리든 그것은 나의 의지이고 자유겠죠. 환상을 어떻게 그려내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환상은 현실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꿈꿀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모두가 어우러져 함께 할 수 있을 때 더욱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거예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삶의 의미를 멋지게 그려낸 그림책, 인간 내면의 세계를 깊이있게 이해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수지 작가의 개성이 빛을 발하는 그림책, 펼쳐보는 순간 기분이 유쾌해지는 그림책 “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