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이들의 책임

■ 발행 : 2018/08/08
■ 마지막 업데이트 : 2018/08/16


굿 나이트 스토리즈 포 레벨 걸스

얼마전 국내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했던 책 “굿 나이트 스토리즈 포 레벨 걸스 – 세상에 맞서는 100명의 여자 이야기”를 받아봤는데 실망이 큽니다. 원래 가온빛에는 좋은 책만 소개하고 굳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책들에 대한 비평은 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이번엔 왜곡된 한일간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몇 자 적습니다.

이 책은 부제에서 설명한대로 세상에 맞서는 100명의 여자 이야기입니다. 킥스타터에서 펀딩을 했는데 13,000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67만 달러가 넘는 금액을 후원 받았을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던 책입니다. 세상에 맞선 100명의 여자 중에는 우리나라 여자도 한 명 있습니다. 책 받자마자 우리나라 사람도 소개됐을까 궁금해서 제일 먼저 찾아봤습니다. 선덕여왕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진구’였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선덕여왕 소개글보다 더 먼저 읽어보기 위해 해당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는데 왠지 잘못되어 있을거라는 불쾌한 확신이 들더군요. 그리고 역시나…….

굿 나이트 스토리즈 포 레벨 걸스

진구는 황제에게 군사를 이끌고 ‘놀랍고 눈부신 것들로 가득한 나라’ 신라를 침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략) 임신 중이던 진구는 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황제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직접 나서서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런 다음 군대를 이끌고 동해를 건너가 신라를 정복했다. 자신의 꿈이 예견한대로였다.

– “굿 나이트 스토리즈 포 레벨 걸스” 진구 편 중에서(180쪽)

이제는 일본 역사계에서조차 폐기 처분되다시피 한 ‘임나일본부설’을 한 때 주장했었던 일본 역사학자들과 국내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이 그 근거로 제시한 세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설화에 가까운 진구 황후 이야기입니다. 임신한 황후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 건너 풍요로운 나라를 정복했다는 스토리가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소재였을 수는 있겠지만 사실 확인 조차 하지 않고 낸 이 책을 적어도 킥스타터를 통해 후원한 전세계 만삼천여 명의 아이들이 읽게 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힐 수 밖에요.

원작자들이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아시아의 여성 인물들도 필요했을 수 있고 성의 없는 리서치를 통해서 이와 같은 인물들을 선택하고 잘못된 내용들을 게재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한글판 출간을 기획한 출판사나 번역을 맡은 이는 뭘 한 걸까요?

제가 만약 이 책의 국내 출간을 맡은 담당자였다면 번역을 위해 원작을 처음 받아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 원작자들에게 내용 중 일부가 잘못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이 내용 그대로는 출간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준다.
  •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는 방법으로는
    • 진구를 빼고 다른 일본 여성을 선별해서 소개하거나
    • 원작자들이 원작 수정을 원하지 않을 경우 해당 페이지에 바로 잡는 내용을 추가하겠다

이 정도의 커뮤니케이션만으로도 우리나라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원작자들 역시 제대로 된 역사를 알 수 있었을텐데 이미 책은 원작 그대로 출간되었습니다(제가 원작까지 확인한 건 아닙니다. 내용상 원작 그대로 옮겼기에 이런 일이 생겼을거란 생각에 ‘원작 그대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처음 이 책 출간을 기획한 분들, 편집을 맡은 분들, 그리고 번역을 맡은 분 중에서 누구 하나라도 문제 제기를 했었는지, 했었다면 왜 해결이 안되고 원작 그대로 출간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굿 나이트 스토리즈 포 레벨 걸스

선덕여왕에 대한 부분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속에 세상에 맞선 대표적인 여자가 과연 선덕여왕이었을까요? 그림도 영……. 저게 세상에 맞선 여자의 모습인가요?

세상에 맞선 여자로 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저는 제일 먼저 화가 나혜석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에 나오는 100명이 다 덤벼도 세상에 맞서기로는 나혜석에게 견줄만한 이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덕여왕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에서 세상에 맞선 여자를 찾으려 들었다면 선덕여왕보다는 나혜석이나 김연아가 더 쉽게 검색되었을텐데 어떤 과정에서 선덕여왕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말이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열여덟 살 유관순 열사는 지하 독방에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순국했습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의 동풍신 열사는 함경북도 명천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이곳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태극기를 그린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 백범 김구 선생의 강직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 3.1운동 직후인 3월 9일 46세의 나이에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근우회 사건을 주도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활동을 한 박차정 열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경을 6차례나 넘나든 정정화 의사, 우리에게는 3.1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의 어머니들도 있었습니다.

제99주년 3·1절 기념사 중에서

이 짧은 두 단락의 문장에만도 세상에 맞선 일곱 명의 여자들과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나옵니다. 행주산성이란 이름 속에 세상에 맞선 여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바보 온달을 고구려 으뜸의 장군으로 거듭나게 한 여자 평강 공주도 있습니다. 우리의 길고 긴 역사 속에 여자들의 흔적이 없는 시절이 있었던가요? 이번 책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낸 출판사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세상에 맞선 여자들을 찾고 정리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멋진 책을 다시금 선보이는 건 어떨까요?

그저 만들어진 책을 사서 보고 몇 마디 평하는 주제에 책 한 권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섣불리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아이들이 읽을 책이기에 최소한의 ‘책만드는 이들의 책임’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들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내용 추가(2018/08/16)

오늘 우연찮게 알라딘에서 이 책이 품절 상태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온라인 서점들도 확인해보니 예스24, 교보문고, 영풍문고 역시 모두 품절 상태였습니다. 구독자 얼마 되지 않는 가온빛의 한 페이지 글 때문일리는 만무하고, 출판사 내부적으로 간과했던 오류를 인지하고 사후에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듯 해서 역시 메이저 출판사답구나 생각해봅니다.

독자 입장에서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기보다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원작자들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출판사 한 곳에 떠넘길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원작자들이 꽉 막혔다면 이 문제에서만큼은 출판사가 할 수 있는 건 이 책을 출판한다 안한다의 결정 정도일테니까요.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는 유구한 역사가 있고 그 속에는 세상에 맞선 여성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100명의 작가가 쓰고, 100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세상에 맞선 100명의 대한민국 여자들… 왠지 우리 딸들을 위해 멋진 책 한 권이 나올 것만 같은 느낌 팍 들지 않나요?(음… 이래서 독자는 책 살 때 말고는 도움이 안되나봅니다 ^^)


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6 Replies to “책 만드는 이들의 책임

  1. 이 책 검토했다 진구 황후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출판사 사람입니다. 원저작자가 절대로 안 된다고 아주 강경한 입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결국 내려면 원서 그대로 내고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

    1. Manooy 님, 반갑습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순수창작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겠다는데 강경하게 거부한다니 원작자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이 글을 쓰면서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네요.

      이런 일들을 바로잡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구나란 걸 새삼 느낍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시는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게 되네요.

  2. 임나일본부설은 정식으로 폐기된 내용인데, 그때 내세운 이야기를 버젓이 펴내고
    또 우리말로 번역까지 하다니요.

    제 블로그와 카페에 공유해도될까요?

  3. 저도지난번에 링크 공유하고 김영사 블로그에 이 책 소개글이 떳길래, 진구가 신라를 세웠다는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읽으라는 거냐고 댓글을 달아줬네요. 오늘 다시 블로그에 가보니 이 책을 소개하는 글 자체가 삭제되고 없군요.
    분별할 수 있는 좋은 정보를 알게되어서 감사해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