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

예배당 문간방에서 더부살이하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약한 청년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비좁은 곳이지만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에 늘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그 초라한 곳에 찾아오는 사람은 지체 장애와 지적 장애가 있는 열여섯 창섭이 뿐입니다.

창섭이는 울 줄을 몰랐다.
아픈 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창섭이와 내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걸.

부슬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 청년이 글을 쓰고 있는 문간방에 창섭이가 찾아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창섭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에 섣불리 방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밖에서 기다립니다. 질퍽한 마당에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청년이 들어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들어오라는 말 한 마디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창섭이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들어와 청년의 등너머로 기웃거립니다. ‘말을 걸어줄까?’ 잠시 고민하던 청년은 그냥 모른 채하며 글쓰기를 이어갑니다.

바로 그 때,

“서새니도 냉가 시치?”

창섭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선생님도 내가 싫지?” 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무언가에 쿡 찔린 듯 청년은 움찔합니다.

순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창섭이의 얼굴, 그의 눈이
슬프게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말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음 한 켠에서 치미는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청년에게 창섭이가 먼저 말을 겁니다. 배가 고팠는지 ‘뭐 먹고 싶다’며 침을 꿀떡 삼키지만 청년에게는 찐 감자 한 알 조차 없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배고픔이 달래지기라도 하는 듯 둘은 1절, 2절, 3절… 되풀이하며 제법 신나게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찬송가 소리 아래 나란히 드러누운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누가 더 잘나고 못날 것 없이 똑같은 존재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곁을 지켜주는 이 아무도 없는 힘겹고 외로운 삶입니다.

그리고 한 달이 흐른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창섭이가 배가 아프다며 청년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으니 찬바람이 들어서 그렇다며 창섭의 옷만 대충 여며 주고는 떠밀듯 쫓아냈습니다. 그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과 동네 어른들, 교회의 집사나 장로, 학교 선생님이 그랬듯이.

배가 아프다고 한 창섭이를
내가 떼밀어 쫓아 버린 다음 날,
창섭이가 죽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새니도 냉가 시치?”

보슬비 내리던 가을날
창섭이가 내게 들려준 한마디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을 찾아주는 건 창섭이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자신과 창섭의 처지가 같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창섭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모습이 문득문득 비춰지는 것을 느끼고 그래서 자신에게 자꾸만 다가서는 창섭을 번번이 뿌리쳤었던 걸지도…

말동무가 필요해 찾아온 창섭을 서운하게 했던 지난 가을날엔 둘이 나란히 누워 배고픈 찬송가를 함께 부르며 그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도 내가 싫지?” 하던 그해 가을 창섭의 말 한 마디가 후회와 자책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청년의 귀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해 가을

그해 가을

권정생(원작), 유은실 | 그림 김재홍 | 창비
(발행 : 2018/12/14)

2018 가온빛 추천 그림책 BEST 101 선정작

“그해 가을”은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집 “빌뱅이 언덕”에 수록된 7쪽 분량의 글을 유은실 작가가 그림책에 맞게 고쳐 쓰고, 거기에 김재홍 그림 작가가 부슬비 내리던 어느 가을의 스산함과 가난하고 외로운 두 영혼의 쓸쓸함을 사실적이면서도 묵직하게 그려낸 그림책입니다.

그해 가을 배고픈 청년 권정생이 한 아이의 쓸쓸한 삶을 통해 ‘한 마리의 벌레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건 더없이 고귀하다’는 뼈저린 깨달음에 아파했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잠시 숨가쁜 걸음을 멈추고 아픔을 덜어줄 이웃이 있지는 않은지 잠시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4 Replies to “★ 그해 가을

  1. 권정생 선생님도 이럴때가 있었다니 조금 위로 됩니다. 이때의 경험이 더 사랑많은 분으로 만들었군요.

    1.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에는 살아있는 경험들이 진솔하게 담겨있기에 마음 한 켠 진한 여운을 남겨주는가 봅니다.

  2. “살아 있는 건 더없이 고귀하다” 에 눈과 마음이 꽂힙니다.
    귀한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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