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릇이에요

처음에 나는 흙이었어.
나는 차가운 물을 만나서 그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사람들이 발로 나를 꼭꼭 밟았어.
사람들이 손으로 나를 조몰락조몰락 만졌어.
뜨거운 불도 만났어!
활활 타는 불길에 나와 같이 있던 물이 모두 달아나 버렸지.
살랑살랑,
붓 끝이 나를 간지럽히기도 했어.
그랬더니
그랬더니…

이제 나는 흙이 아니야.
나는 그릇이 되었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

(중략)

나는 그릇이야.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
오늘은 무엇을 담게 될까?
어떤 기억을 담게 될까?

그저 한 줌의 흙이었을 뿐인데 차가운 물과 섞이고 사람의 수고와 땀으로 그 모양을 갖춘 뒤 뜨거운 불길을 온전히 견뎌내어 하나의 그릇으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릇으로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었을뿐, 이제 좋은 인연을 만나 그릇으로서 고유의 용도를 찾고 그에 걸맞게 쓰이며 세월을 보내면서 그 안에 소중한 기억과 훌륭한 삶을 담아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가만 보면 사람과 그릇의 삶이 많이 닮았습니다. 모양도 크기도 똑같은 그릇인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밥그릇이나 술잔이 될 수도 있고, 멋진 화가를 만나 한 폭의 명화를 탄생시기키 위한 물감을 품을 수도 있을 테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변호사인데 누구는 부패한 정치인이나 사업가의 변호를 맡고, 누구는 수임료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똑같은 정치인인데 누구는 이 사회에서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위해 목청을 높이고, 누구는 온갖 핍박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을 위해 노력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그릇인가요? 여러분의 그릇에 어떤 삶을 담고 싶습니까? 저마다 꿈꾸는 삶의 모양새는 다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모두 똑같은 바람일 겁니다. 먼 훗날 내 아이가, 또는 다른 누군가가 내 그릇에 담긴 삶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런 삶이길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평범한 그릇 하나에서 소중한 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멋진 그림책 “나는 그릇이에요”,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는 걸까, 계속 해야 하나 하는 고민과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모든 이들에게 권합니다.


나는 그릇이에요

나는 그릇이에요

글 최은영 | 그림 이경국 | 꼬마이실
(발행 : 2019/01/15)

“나는 그릇이에요”는 흙으로 빚어낸 우리 전통 그릇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그릇들의 생김새와 쓰임새, 그리고 이런 그릇들이 우리 삶과 어우러져 어떤 이야기와 의미를 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뒷부분에는 우리 삶 속에 다양한 형태와 의미로 자리잡고 있는 그릇들이 제작 과정에서부터 재료나 그 형태와 무늬, 용도 등을 통해 우리가 추론하고 밝혀낼 수 있는 비밀들이 그릇에 숨겨져 있음을 가르쳐주는 재미있는 내용들에 이르기까지 알차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책을 빛나게 하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이 단순히 음식이나 물건 뿐만은 아님을, 우리가 살아온 삶의 시간들과 그 위에 수놓인 소중한 기억들도 그릇에 담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두 작가의 혜안입니다.


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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