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나다

문득 거울을 보니 내 머리에 풀이 나 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애초부터 내 머리에 풀이 나 있었던 걸까요? 뭘 잘못 먹었나?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당혹스러움도 잠시뿐. 당장 저 풀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합니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놀릴 게 뻔한데 그냥 뽑아 버릴까?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 있으면 모두 시들어서 없어질까? 최소한 더 자라지는 않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려나? 모자를 쓰면 가릴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풀은 점점 더 머리 전체로 퍼지더니 심지어 꽃봉오리도 맺었습니다. 조금 지나니 꽃들이 활짝 피고 이제는 나비까지 꽃들을 찾아 내 머리 위로 날아듭니다. 더 이상 모자로는 가릴 수 없을만큼 무성해진 풀과 꽃.

처음에 놀랐던 마음은 두려움에 몸서리 치다가 분노로 치닫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하필 나야? 하지만 아무리 걱정해봐도 아무리 화를 내봐도 머리에 난 풀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결국 분노는 체념과 우울로 시들어버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 꼭 남들과 똑같으란 법은 없지 뭐. 머리에 풀과 꽃이 핀 것 정도는 따지고 보면 큰 불행도 아닌걸. 남들이 어떻게 보건 나만 행복하면 돼!

모자가 참 예쁘네요.

모자가 아니에요.
나예요.
풀이 나예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방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불안과 짜증, 두려움 등의 불편한 감정들이 하나둘 내 마음에서 떠나갑니다. 이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다정스레 다가와 모자가 참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누군가에게 담담하지만 또렷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자가 아니라 나예요. 풀이 나예요!” 라고.

어느 날 머리에 나기 시작한 풀. 이상하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없어지길 바라며 외면할수록 내 머리에 난 풀은 점점 더 흉물이 되어갈 겁니다. 보아야 보인다는 말처럼 자꾸만 돌아보고 하나라도 더 예쁜 구석을 찾다보면 풀은 서서히 내 눈을 거쳐 마음으로 들어올 겁니다. 그렇게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나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나눠줄 수 있고, 그렇게 나눠준 사랑이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 그림책 “풀이 나다”입니다.


풀이 나다

풀이 나다

글/그림 한나 | 딸기책방
(발행 : 2020/09/21)

“풀이 나다”는 어느 날 머리에 피어나기 시작한 풀로 인해 시작된 마음 앓이가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누구나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숨겨왔던 비밀이나 단점을 받아들이며 다른 누구처럼이 아니라 오로지 나답게 살아가자고 말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의 매력은 글과 그림의 묘한 부조화가 주는 힐링입니다. 글은 당황스러움으로 시작된 감정이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치닫는 과정을 서술하지만 그림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낄 수 없습니다. 풀을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당당하게 “풀이 나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시점까지 소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눈빛은 심지어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마치 풀이 나임을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덕분에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글의 전개와 무관하게 나의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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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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