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의 여행
책표지 : Daum 책
오리건의 여행

(원제 : Le Voyage D’Oregon)
라스칼 | 그림 루이 조스 | 옮김 곽노경 | 미래아이
(발행 : 2002/12/31)


“오리건의 여행”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길을 나선 듀크와 오리건의 묘한 동행을 담담하게 그려낸 그림책입니다. 난쟁이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은 서커스단에서 만난 사이였어요. 듀크는 스타 서커스단 최고의 광대였고, 오리건은 듀크가 무대에 오르기 바로 전에 재주를 부리는 곰이었습니다.

오리건의 여행

자신의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을 만치 작은 자전거에 올라타 재주를 부리고 있는 오리건의 모습은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무척이나 쓸쓸해 보입니다. 공연이 끝나면 듀크는 오리건을 우리로 끌고 갔어요. 앞서가는 이는 듀크이고 뒤따라가는 이는 분명 오리건인데 무언가 두 그림자가 참 많이 닮아 보입니다. 자유를 빼앗긴 곰과 서커스 단에서의 삶 밖에는 알지 못하는 광대 듀크의 손짓이나 발걸음, 쓸쓸해 보이는 느낌까지 말이죠. 어느 날 오리건을 우리로 끌고 가던 듀크에게 동화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일어납니다.

“듀크, 나를 커다란 숲속으로 데려다 줘.”

어쩌면 그 목소리는 오리건의 소리가 아닌 듀크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오리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던 듀크는 그날 밤 숙소 의자 위에 올라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깨달았어요. 오리건은 아름다운 가문비나무 숲에서 곰 식구들과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누가 압니까?
혹시 나도 그곳에서 백설공주를 만나게 될지….

오리건의 여행

무거운 짐과 열쇠 꾸러미는 서커스단에 두고 둘은 컴컴한 밤에 길을 나섰어요. 비에 젖은 공장 굴뚝에서 퍼져 나오는 검은 연기와 잿빛 하늘, 그 삭막한 풍경이 오리건에게 어울릴 아름다운 가문비 숲을 찾기까지 몹시 고단한 여정이 이어질 것을 예고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둘은 망설임 없이 성큼 나아갑니다. 어둠 속에 억압된 채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오리건에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열어줄 그 세계를 찾아서…

오리건의 여행

시카고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햄버거 삼백 개를 사고 나니 가지고 있던 돈은 바닥이 나버렸어요. 오리건과 여행하는 게 행복해서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고 덤덤하게 듀크는 말했지만 왠지 이 풍경은 길을 나서기 전의 삶에 대한 미련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햄버거를 먹는 곰과 여전히 얼굴에 분칠을 하고 빨강코를 단 채로 콜라를 마시며 영화를 보고 있는 듀크, 어쩌면 그는 오리건과의 약속을 지킨 후 다시 서커스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까지 일방적으로 자신의 재주를 남에게 보여주기만 하는 삶을 살았던 듀크와 오리건은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들에게 질문을 받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트럭 운전수 스파이크는 둘을 아이오와 주까지 태워다 주면서 이렇게 물었어요.

“왜 아직 빨강코에 분칠을 하고 있소? 이젠 서커스 무대에 서지도 않는데.”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오리건의 여행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나는 반 고흐의 그림 같은 들판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지요.

노랗게 물든 밀밭을 헤치며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듀크와 오리건, 목말을 탄 듀크는 멀리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그림 같은 풍경 속을 묵묵히 걷고 있는 오리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들판 저 너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밀밭의 서걱거리는 소리까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좁은 공간, 잿빛 삭막한 풍경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요. 떠나온 길이 멀어질수록 색감은 환하게 변해갑니다. 듀크와 오리건의 마음처럼.

우박이 내리면 맞으면서 걷고, 옥수수 밭에서 잔치를 벌이고, 별빛 아래에서 꿈을 꾸며 그렇게 오리건과 함께 길을 가는 동안 듀크는 온몸으로 느낍니다. 온 세상이 둘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듀크는 남은 동전 두 개를 미련 없이 강물에 던져버렸어요. 버리고 온 열쇠 꾸러미처럼, 햄버거를 사 먹는데 다 써버린 돈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듀크는 완벽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겠죠.

오리건의 여행

드디어 듀크와 오리건은 꿈꾸던 숲을 만납니다. 어둠 속 좁은 서커스 천막 안을 밝히던 노란 불빛과는 너무도 다른 저녁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둘의 뒷모습은 어쩌면 이리도 닮았을까요?

숲을 향해 달려가는 오리건의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오리건은 갇혀 지낸 나날들을 모두 잊은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 오리건을 바라보는 듀크의 마음도 아마 똑같았을 것입니다. 오리건을 오리건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듀크는 편안한 모습으로 잠든 오리건 곁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결심했어요.

아침이 하얗게 밝아 오면,
나는 떠날 겁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오리건의 여행

하얀 눈 위에 찍힌 듀크 발자국,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벗어버리지 못했던 듀크의 빨간 코가 하얀 눈 길 위에 버려져 있습니다. 오리건을 데려다주는 곳에서 어쩌면 백설공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 듀크는 이 여정의 끝에서 만난 순백의 눈 위에 과거에 대한 마지막 미련의 끈을 미련 없이 던져 놓고 떠납니다.

오리건의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듀크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이지 않아요. 잊어버렸던 본 모습을 되찾은 듀크는 분명 과거와는 다른 새 삶을 살아갈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글자 없이 남겨진 마지막 장면에서 뭉클함을 넘어선 벅찬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림책을 다 읽고 한 장면 한 장면 다시 떠올리면서 속표지에 실린 랭보의 시 ‘감각’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처음 읽었을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겁니다.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아르튀르 랭보의 시 ‘감각’중에서

평생 광대로 사는 삶 외에 다른 어떤 삶도 생각해 본적 없었던 듀크가 오리건과의 여행 속에서 그동안의 삶을 털어내고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오리건의 여행”,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그림 속에 잘 녹아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여운을 남기는 명작입니다.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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