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또 오고

봄은 또 오고

(원제 : Les Printemps)
글/그림 아드리앵 파를랑주 | 옮김 이경혜 | 봄볕
(2024/01/15)


봄 햇살처럼 온화하고 따스한 노란빛 속에서 세상모르고 깊게 잠든 아기. 이 세상 모든 평화와 안녕과 사랑이 이 그림 한 장에 담겨있습니다. 아기와 노란색은 참 잘 어울려요. 표지 위에 손바닥을 얹고 조용히 그 기운을 느껴봅니다. 책 속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져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편안해집니다.

하드커버 안에 도톰한 재질로 구성된 내지 서른세 장으로 구성된 그림책 『봄은 또 오고』의 첫인상은 오래된 앨범을 만나는 느낌이었어요. 엄마가 한 장 한 장 사진을 모아 소중하게 간직해 둔 앨범, 그 사진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나의 오랜 기억과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봄은 또 오고

태어나서 두 살까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어.

아무런 기억이 없어서 나 자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기억에만 없을 뿐이지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건 그 시절 나를 품어준 세상 덕분이겠지요. 바탕색으로 쓰인 옅은 보라색은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나를 돌보아 준 그분들의 헌신적 사랑입니다.

봄은 또 오고

세 살의 봄, 나는 바다에서 첫 걸음마를 떼지.
파도 거품 속 가지런히 놓인 나의 두 발,
내가 간직한 첫 기억이야.

살면서 느끼는 수많은 기억들… 그건 어떤 감촉, 향기, 맛, 색깔이나 이미지로 남아 나의 일부가 됩니다. 첫 걸음마를 뗀 내가 두 발로 서서 처음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 첫걸음 이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을 통해 삶의 시간을 채워가며 여기 이 시간까지 온 것이겠지요.

봄은 또 오고

네 살의 봄, 아빠는 도랑가에서 딴
아주 작고 빨간 열매를 맛보게 해 주지.
혀끝에 남은 산딸기의 기억은
그 뒤로도 내내 사라지지 않아.

페이지마다 뚫려있는 크고 작은 세모, 마름모 모양의 구멍은 기억의 흔적입니다. 바닷가에서 엄마 손을 잡고 첫 걸음마를 뗀 기억은 세모 모양의 구멍으로 이어지며 시간이 흘러 서른둘의 봄, 바다에서 딸에게 첫 걸음마를 가르치던 기억과 이어지게 되죠. 열다섯의 봄에 받은 진한 뽀뽀의 기억은 그녀와 이별한 후에도 계속 이어지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서야 메꾸어집니다. 기억은 그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내 삶을 만드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을 이 흔적의 구멍들이 보여주고 있어요.

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 강렬했던 첫사랑의 기억,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 첫 걸음마를 떼고, 자라서 독립을 하고, 내 아이가 낳은 아이를 만나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 정원에 있던 키 큰 호두나무는 예순여덟의 봄엔 사라지고 밑동만 남아있어요.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모든 것은 사라지고 지워져버리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내 삶을 찾아옵니다. 들판에 하늘에 바람에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봄! 지금 여기 살아있기에 만날 수 있는 봄!

여든다섯의 봄,
지금껏 이렇게 봄을 사랑한 적은 없었어.

때론 달콤하고 때론 아프고 때론 가슴 묵직해지는 인생의 기억을 따라 서른세 장의 페이지 넘기다 보면 그림책 속에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어느 순간 그림책을 읽는 나 자신이 되어 있습니다. 지나온 수많은 봄,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을 소환하는 아름다운 그림책 『봄은 또 오고』, 지나고 돌아보니 인생은 온통 사랑뿐이었습니다. 햇살 같은 노란 봄빛 가득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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