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이

온양이

선안나 | 그림 김영만 | 샘터사
(발행 : 2010/04/25)


“온양이”는 한국전쟁 중 있었던 흥남 철수 작전에서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 온양호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아픔과 이산 가족들의 그리움, 그리고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태어난 한 생명을 통해 우리들 가슴에 다시금 꿈과 희망이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그림책입니다.

온양이

“어쨌건 애들부터 살려 놓고 봐야 하지 않겠니?
명호랑 명남이 데리고 얼른 남쪽으로 가라우.
별일 없으면 다시 돌아오면 될 테지.”

미군 철수와 동시에 폭격이 시작되면 함흥 땅이 불바다가 될 거라는 소문에 할아버지는 떠밀듯 며느리와 손주들을 피란길로 떠나 보냅니다. ‘별일 없으면 다시 돌아오면 될 테지.’ 하며… 그 당시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나누며 헤어져야만 했을지… 70여 년이 지나도록 서로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전쟁터에 끌려간 아버지 대신 엄마와 동생 잘 돌보라 당부하는 할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 드리는 어린 명호가 저 때 아홉 살이었으니 2021년 지금의 그는 팔순의 노인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면 모를까… 팔순의 명호는 북녘땅에 두고 온 할아버지를 그리며 죄스러운 세월을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온양이

철수하는 군인만 십만 명이고, 피란민도 그 정도 되었습니다. 전투 지역에서 온 피란민 가운데는 다친 사람도 많았습니다. 폭격에 가족을 잃고 미쳐 버린 사람도 있고, 꽁꽁 언 시체가 구석에 뒹굴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살자고 찾아온 곳은 지옥과 다를 바 없이 참혹하기만 합니다. 셋째를 가져 몸이 무거운 엄마 대신 동생을 업고 선 어린 명호.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그래봐야 어른들 틈에서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기 힘든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명호네 가족은 그렇게 부두에서 며칠을 배를 기다렸습니다. 군인들이 먼저 떠나고 배가 한 척 한 척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피란민들도 조금씩 조금씩 줄어듭니다. 눈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많았던 피란민들이 사뭇 줄어들자 명호네 가족도 희망이 생깁니다. 이제 곧 자신들의 차례가 오겠구나 싶어서요.

온양이

12월 24일이 되었습니다. 곧 배가 끊길 거라는 말이 퍼지면서, 남은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배에 올랐습니다. 난간의 쇠줄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바다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닫히는 선수 문에 끼어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부모 형제와 헤어져 울부짖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곧 배가 끊길 거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만삭의 명호 엄마는 살기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몸싸움을 배겨내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모든 건 어린 명호에게 달렸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났는지 명호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아가 선원 하나를 붙잡고 매달려 사정합니다.

만삭의 엄마와 어린 동생을 확인한 그는 명호네 가족들이 배에 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모두 무사히 배에 올라탄 후 선원은 웃으며 명호의 어깨를 다독여줍니다. 순간 명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습니다. 엄마와 동생을 이 배에 태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겁먹었던 긴장이 한 순간에 풀린 탓이겠죠. 가족을 지켜내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자책의 눈물일런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가족만큼은 반드시 내 힘으로 지켜내리라는 다짐의 눈물일 수도 있겠구요.

간절한 눈으로 선원을 올려다보는 명호. 며칠 전 G7 정상회의에서 각국의 정상들이 우리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와 회의 기간 내내 전해져 오는 그 분위기에 국민들이 환호하는 바로 오늘의 현실과 대비되어 아이의 절박한 표정이 더욱 애잔합니다.

온양이

방금 전까지 배에 올라타기 위해 사력을 다했었던 피란민들이 갑판에 콩나물처럼 모여 섰습니다. 살기 위해 벗어나려고 그토록 몸부림쳤던 바로 저 곳, 저만큼 멀어진 저 곳은 이제 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운 고향입니다. 함께 빠져 나오지 못하고 고향에 남은 가족들이 바로 저기 있건만…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부두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걸 지켜보는 이들의 착잡하고 막막한 마음을 글로도 그림으로도 어찌 다 표현할까요…

온양이밤새 진통을 겪던 엄마는 다음 날 아침 갑판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따뜻할 온(溫), 볕 양(陽) 온양이. 다시는 이리 모진 추위 겪지 말고 따뜻하고 환하게만 살라고 붙여준 이름입니다. 명호네 가족과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온양이가 타고 온 흥남부두의 마지막 배 ‘온양호’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금 이 곳이 삶의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피란민들은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 소리에 죽음이 아닌 삶의 자리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번갈아가며 아기에게 건네는 그들의 덕담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삶의 다짐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내일의 꿈과 희망입니다.

온양이

난리통에 용케 사진 한 장은 품에서 놓치지 않았나 봅니다. 빛바랜 사진 속 명호네 가족들. 고향을 떠나기 전 미군의 폭격으로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 고향집에 홀로 남아 자식 며느리와 손주들 기다리고 계실 할아버지, 전쟁통에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 모두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세워 놓은 명호네 막내 온양이 사진. 이렇게 새 가족 사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움의 세월로 켜켜이 쌓인 가족 사진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가득한 가족 사진입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분단의 아픔을 섬세한 펜 터치로 그려낸 그림책, 두 장으로 분리된 명호네 가족 사진을 통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수많은 이들의 아픔과 눈물 어린 희생 덕분이었음을 일깨워 주는 그림책, 앞으로 우리가 지켜내야 할 평화의 참된 의미와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그림책 “온양이”였습니다.


잠깐!

흥남 철수 작전 하면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저에게 그림책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 한 마디가 무겁게 다가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만 있었던 게 아니라고,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애썼던 200여 척의 배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고…

세간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철수의 마지막 배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24일에 떠난 마지막 배는 온양호입니다. 배 이름이 중요하다기보다, 군함부터 작은 고깃배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애썼던 200여 척의 배도 함께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떠난 배 ‘온양호’ 말고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또 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 1군단장을 맡았던 김백일 장군과 미군 10군단장의 민간인 고문관이었던 현봉학 박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온양이”에서 원래 군인과 군수물자만 철수 시키려 했던 미군 사령관을 설득하는 ‘한국인 통역관’과 ‘어떤 한국인 장군’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바람대로 “온양이”를 읽고 난 우리 모두 70여 년 전 그날 피와 땀으로 조국과 내 가족 내 이웃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다 한 그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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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mi Kim
sun mi Kim
2021/06/19 00:47

가족을 지키려는 명호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은 마음에 울컥했습니다.
그리고 빅토리아호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애씀이 있었군요.
저도 기억하겠습니다.^^=

가온빛지기
Admin
2021/06/25 22:54
답글 to  sun mi Kim

sun mi Kim 님, 따뜻한 공감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분들의 수고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주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늘 감사하며 살아요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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