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혼란

대혼란

(원제 : Le Grand Désordre)
글/그림 키티 크라우더 | 옮김 이주희 | 논장
(발행 : 2021/06/15)


정리 정돈이 너무나 어려운 에밀리엔, 온종일 쓸고 닦고 치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실바니아, 물건 하나하나에 따뜻한 의미를 부여하는 미크,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고양이 다게레오타이프 그리고 그렘린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까만 요정들, “대혼란”의 등장인물들입니다.

작가 키티 크라우더는 마치 우리 주변에 꼭 있을 것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방식,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어요.

낮에는 질서가 필요하지만,
밤에도 그런지는 모르겠어.
난 잠을 자니까.
알 게 뭐야,
밤마다 물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닐지.

대혼란

에밀리엔은 (필요시 대화가 가능한) 검은 고양이 다게레오타이프와 함께 살고 있어요. 이웃에는 친구 실바니아와 미크가 살고 있지요. 정리 정돈에 완벽한 실바니아는 가끔 에밀리엔의 집을 찾아왔다가 지저분한 집을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시 앉았다 급하게 되돌아가곤 했어요.

에밀리엔은 아무래도 여름맞이 대청소가 필요할 것 같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잠시 생각만 했을 뿐, 산들바람에 실려온 바다 냄새, 살랑이는 햇빛의 유혹에 만들다 만 들꽃 표본 책을 만들고 싶어져 그만 밖으로 나가버렸지요.

대혼란

책 정리를 시작했지만 커다란 진전이 없자 에밀리엔은 미크를 찾아가 정리 정돈 비법을 물었어요.

“미크는 어떻게 정리하길래 집 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요?”
미크가 빙그레 웃었어요.
“난 물건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

미크는 물건마다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있고 그 물건만의 사연이 있기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에밀리엔에게 전합니다. 미크의 정리 정돈의 비법은 물건들을 좋아하는 것, 집안에 놓인 작은 조약돌 하나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대혼란

에밀리엔은 드디어 대청소를 시작했어요. 잊고 있었던 물건을 찾고 물건들의 자리를 잡고 쓸고 닦고. 그 와중에도 청소 관련 책 읽는 것을 잊지 않았지요.

먼지가 조금 멀리 날아가 실편백나무들 위에서 춤을 추자,
햇살 속에 반짝반짝 황금비가 내리는 것 같았어요.

대청소를 끝낸 에밀리엔은 실바니아와 미크를 초대했어요. 먼저 도착한 미크는 집 상태가 어떻든 에밀리엔을 찾아올 거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실바니아가 오지 않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에밀리엔은 우연히 정원 너머 커다란 쓰레기 더미를 보게 됩니다. 실바니아는 싫증 난 물건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쌓아두고 살고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우선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두는 것. 그것이 실바니아의 정리 비결이었어요.

자신의 치부를 들킨 실바니아, 뒤틀린 관계 때문에 슬픔에 잠긴 에밀리엔, 에밀리의 집을 찾아온 미크. 세 사람은 여름맞이 대청소 기념 파티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요?

에밀리엔에게 물건은 그리움이자 추억, 삶의 흔적이에요. 실바니아에게 물건은 치워야 할 대상이지요. 미크에게 물건은 다양한 사연과 의미이며 사람들과의 연결고리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답인지는 판단할 수 없어요. 가치관이 다르고 우선 순위가 다르기에.

“대혼란”은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출발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넘어갔다 다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글도 제법 길어요. 한 장 한 장 스토리를 따라가며 그림책을 즐겨도 좋고 여러 번 읽으면서 새로운 이야기와 의미를 발견하면서 읽어도 좋아요. 마음에 남는 문장들을 발견하고 수집하기에도 아주 좋은 그림책이에요.

대혼란
다게레오타이프의 생생한 표정들

에밀리엔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무언가 다 알고 있는 듯한 검은 고양이 다게레오타이프의 생생한 표정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고 독서광 에밀리엔의 어딘가 친근해 보이는 집 구경, 책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삶의 무게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따뜻한 성품의 미크, 쓸고 닦고 반짝반짝하게 살아야만 하는 실바니아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예요. 무엇보다 까만 요정들이 그림보는 재미를 톡톡히 살리고 있어요. 에밀리엔이 여름 맞이 대청소를 할 때 짐을 싸서 떠나던 까만 요정들, 하지만 마지막에 다시 되돌아온 걸 보면 물건들이 예전 상태로 돌아갈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어요. 우리 집이 늘 그렇듯이 에밀리엔의 집도 역시나… (이 모든 건 까만 요정들의 농간이었다! ^^)

책 속의 책 에밀리엔의 ‘한숨의 책’도 잊지 말고 감상해 보세요.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주 자세히 알려주고 있어요. 은판 사진술이라는 뜻을 가진 고양이 다게레오타이프의 이름 때문에 은판 사진술이 무엇인지도 검색해 보았어요. 은판 사진술로 찍은 사진은 딱 한 장만 인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딱 한 장의 사진, 딱 한 번뿐인 내 인생. 빠르거나 느리거나 직선이거나 곡선이거나 상관없이 삶은 한 번뿐인 소중한 것이라고 고양이 다게레오타이프가 이야기하고 있어요.

삶의 의미, 관계에 관한 아름답고 몽환적인 이야기 “대혼란”, 오늘도 물음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그림책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끔 한 번쯤은 대청소가 필요한, 삶은 나의 흔적이며 궤적입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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