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요괴

여우 요괴

글/그림 정진호 | 킨더랜드
(2023/02/01)


어릴 적에 엄마 아빠 사이에 쏙 들어가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쥔 채 보곤 했던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 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건 단연코 구미호 이야기입니다. 한 여름밤, 아빠 등 뒤에 숨어서 눈만 내밀었다 말았다 가슴을 졸이면서 끝까지 봤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딱 하룻밤만 참으면 되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비밀을 털어놓은 남편 앞에 여우의 모습으로 나타난 구미호는 ‘정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고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지요. 어린 마음에 정이라는 게 과연 뭘까? 생각하며 무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진호 작가의 신작 “여우 요괴”는 구미호 이야기에서 원형을 가져와 현대적 감각으로 변형시켜 재창조한 이야기입니다. 꼬리 아홉 달린 하얀 구미호는 꼬리 아홉 달린 검은 여우 요괴로 바뀌었어요.

여우 요괴

온갖 동물들의 간 999개를 빼 먹은 천하무적 여우 요괴, 이제 1개만 더 먹으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우 요괴는 전국 팔도에서 가장 간이 크다고 소문난 김생원을 찾아갔어요.

날카로운 이빨과 손, 삐쭉삐쭉 솟은 털, 붉은색 커다란 눈, 이리저리 휘휘 휘두르는 은색 아홉 개의 꼬리로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여우 요괴, 그 기괴한 모습과 행동이 요괴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우 요괴

간 큰 김생원이라는 묘사에 여우 요괴만큼이나 커다란 인물을 상상했는데 작은 꼬마가 등장해 살짝 당황했습니다. 보기에도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캐릭터는 이야기에 긴장감을 부여하며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됩니다.

무시무시한 여우 요괴 앞에서도 김생원은 덤덤하게 자신의 간을 좀 더 크게 해서 먹으면 좋지 않겠냐는 간 큰 제안을 했어요. 김생원의 간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둘은 귀신과 도깨비가 끓는 무덤가에서  밤을 지새워도 보고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기도 했어요. 하지만 다들 여우 요괴에 놀라 줄행랑치기 바빴습니다. 이런저런 제안을 하며 하루하루 죽음을 유예 시키던 김생원은 자신의 간을 빼먹으려고 달려드는 여우 요괴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마지막 제안을 합니다.

“나랑 혼인합시다.”

999개의 간을 빼먹은, 귀신도 도망가고 호랑이도 까무러치는 여우 요괴와 혼인하는 것보다 더 간 큰 짓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혼례 후 커진 자신의 간을 빼먹어도 좋다는 김생원의 청혼에 여우 요괴는 얼이 쏙 빠지고 말았지요.

여우 요괴

그렇게 혼례를 치른 둘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이 된 김생원의 간을 빼먹지 못하고 하루만 더 하루만 더하는 사이 하릴없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노인이 된 김생원이 죽음을 앞두게 되었어요. 애절한 작별을 마치고 김생원의 차가운 몸에서 간을 빼낸 여우 요괴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철철 흘러넘칩니다. 드디어 1,000개의 간을 먹어치운 여우 요괴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우 요괴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잠시 여우 요괴가 되어 상상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미호 이야기가 배신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여우 요괴”는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간을 크게 만들기 위해 여러 시험대를 거치는 동안 여우 요괴는 뜻하지 않게 김생원 곁에서 그를 도와주게 됩니다. 둘이 함께하는 동안 전보다 더 성장한 김생원의 눈에 사나운 요괴는 간데없고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한 생명체만이 눈에 띄었겠지요.

이 세상에서 여우 요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와 두 눈을 마주 바라봐 준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 김생원의 그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된 여우 요괴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타인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것으로 삶을 완성합니다.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지극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수렴합니다.

“무섭고, 아름답고, 애절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피와 꽃 사이, 죽음과 사랑 가운데에 숨은 여우 요괴를 만나 보세요.”

– 정진호 작가의 말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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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이맘
쟌이맘
2023/03/15 11:20

어머…………….. 울컥 눈시울이 붉어진 쟌이애미는 온라인 서점으로 달려갑니다 ㅠㅠ 정진호 작가님을 얼마전 온라인 그림책강연에서 뵌적이 있었는데,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대한 생각이나 작가님의 책 <위를 봐요> 소개, 굉장히 인상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나요. 언제나처럼,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

가온빛지기
Admin
2023/03/31 09:54
답글 to  쟌이맘

정진호 작가님 강연에 반하셨다면 “꿈의 근육”이란 에세이도 한 번 읽어볼만 할 겁니다. 작가님의 그림책들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참 좋은데… 쟌이맘님 지갑 가벼워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

박선미
박선미
2023/03/17 07:53

인간의 입장에서 지어진 이야기^^ 여우는 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그들의 삶에 아쉬움이 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이야기로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진정한상대 #나를알아봐주는 누군가에 대한 수많은 사람중에 나에게 보석같은 사람은 있다!라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싹틔우는 책인것 같아요.

가온빛지기
Admin
2023/03/31 10:01
답글 to  박선미

‘인간의 입장에서 지어진 이야기’와 ‘인간에 대한 애정을 싹틔우는 책’, 상충되는 감상평 보며 북클럽에서의 박선미님이 떠오릅니다. 박선미님은 가온빛 북클럽의 보석같은 사람입니다! 🙂

이은실
이은실
2023/03/19 22:39

어쩜… 마지막이 전혀 예측하진 못한 결말이네요… 삭막한 요즘같은 시대에 절절한 사랑이야기.. 남의 간도 빼먹으려는 사람들보다 더 인간적인(?) 여우 요괴이야기
여우 요괴는 마지막 간을 먹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신(?)에게 따지러 갔을까요?

가온빛지기
Admin
2023/03/31 10:03
답글 to  이은실

이은실님 반갑습니다!
‘사람보다 더 인간적인 여우 요괴 이야기’란 말씀에 많은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자주 뵈요~ 🙂

unlee
unlee
2023/07/26 10:22

두려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림책이라니 너무 감동입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진실한 사랑을 이룰 수 있지”하며 읊조려봅니다.

Last edited 9 months ago by un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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