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월의 딸기

해마다 딸기 수확철이 되면 크고 예쁜 딸기를 놓고 엄마와 딸아이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상품성 높은 실한 것들은 죄다 상자에 담아 내다 팔고 자신에게는 흉 지고 물러진 것만 가득한 바구니를 내미는 엄마. 딸아이는 그런 엄마가 야속해서 “못난이 딸기만 묵어서 나도 못생겨지믄 우짤라고요.”라고 궁시렁 거립니다. 그러고는 딸기밭에 몰래 들어가 제일 통통하고 예쁜 딸기만 골라 따 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딸기는 몰래 먹는 딸기라며 너스레를 떠는 딸아이.

그런데 올해는 이상합니다. 엄마가 크고 예쁜 딸기를 상자에 담지 않고 자신의 바구니에만 수북하게 담아 주니 말입니다. 아이네 집만 그런게 아니라 온 동네에 집집마다 딸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온 동네에 딸기가 넘쳐 나는데 마을 사람들 얼굴은 어둡기만 해서 또 이상합니다.

“엄니, 올해는 딸기가 거저 열렸는가?”
“왜?”
“사방이 딸기 천지니께요. 통통허고 이쁜 것도 막 주고.”
“니라도 많이 먹어라.”

“니라도 많이 먹어라”라며 다시 밭일을 시작했지만 엄마의 목소리에도, 호미를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들일 나갔던 아빠도 엄마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지 일찌감치 돌아와 평상에 걸터 앉습니다. 그런 아빠에게 아이가 또 묻습니다. “아부지, 올해 딸기는 참말로 이상하당께요. 딸기가 단디, 하나도 안 달아요.”라며 천진한 표정으로 조잘거리는 딸아이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의 말에 한숨이 가득합니다.

“올해 딸기는…”
아빠는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어요.
“울음소리가 들어서 근갑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딸기 이야기 뒤로 펼쳐지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시민들을 향해 진압봉을 가차 없이 휘두르는 군인들, 횃불을 들고 평화로이 행진하는 시민들, 폭력에 맞서 무장한 시민들,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전차들, 무참한 군화에 짓밟히는 시민들… 그리고 딸기 송이마다 알알이 맺힌 시민들의 얼굴, 그 자리에 든 울음소리들…

한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이상하고 또 이상했던 1980년 5월의 딸기를 통해 그해 5월 광주, 그날의 항쟁을 되새기게 해주는 그림책 “그 오월의 딸기”입니다.


그 오월의 딸기

그 오월의 딸기

그림 김동성 | 글 윤미경 | 다림
(2023/05/18)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제대로 열매 맺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에 차 있었죠. 이명박 박근혜 두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었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요? 이내 다시 겨울이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우리 집 딸기밭의 딸기 중
그냥 빨개진 딸기는 하나도 없대요.
추운 겨울을 견디면서 말캉말캉 달콤해진 거래요.
그래야 동글동글 빠알간, 진정한 딸기가 되는 거래요.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 딸기밭의 딸기 중 그냥 빨개진 딸기는 하나도 없대요. 추운 겨울을 견디면서 진정한 딸기가 되는 거래요’라던 1980년 광주의 아이의 말처럼 우리도 이 나라를 아끼고 걱정하는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곧 봄이 오겠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1980년 그날의 항쟁 속에 서 있었던 광주 시민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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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책
2023/05/19 08:00

근거리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어쩌면 한 발 빼고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니가 광주에 그 시절에 있었다는 것을
어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 알게 되었으니까요.
어떤 아픔 들은 어떤 진실 들은 그렇게
늦거나 아예 지워지거나 하는 방식으로
주변에 있는 것 같아요. 일부러 민낯을 들여다 보려는
의지가 없다면 말이에요.

딸기와 오월의 그날 이야기를 이렇게도 묶어 낼 수 있군요.
작가의 그림책을 꼭꼭 읽어 보고
민낯에 조금 더 다가가 보겠습니다.

이 선주
Editor
2023/06/06 22:05
답글 to  서 책

딸기와 오월의 그날,
그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그림책입니다.
그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흘렀고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는데
여전히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 더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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