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제야 알았어요.
채워 줘서 내가 비우고
비우면 다시 채워 주고 있었다는 것을.

바람 한 사발
흙 한 사발
빛 한 사발
봄 한 사발
여름 한 사발
가을 한 사발
겨울 한 사발 떠오르면

오늘도
그리운 만큼 비워 내요.

부엌에 들어가며 불을 켜려다 스위치 주변에 덕지덕지 남겨진 손때가 문득 눈에 들어옵니다. 순간 치미는 무언가를 간신히 집어 삼키고 밥을 짓습니다. 오늘따라 밥물 끓는 소리가 유난스럽더니 구수한 밥냄새 마저 평소답지 않게 들썩대며 코끝에 들러붙습니다. 목이 메도록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밥을 꾹꾹 눌러 담습니다. 밥그릇 가득 채운 하얀 밥에서 달큰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을 보다 결국엔 왈칵 터지고 마는 그리움.

이제야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내가 밥 한 그릇 뚝딱 비워낼 수 있었던 것은 매 끼니마다 엄마가 그릇을 가득 채워준 덕분이었음을. 그리고, 내가 밥그릇을 비울 때마다 다시 꾹꾹 눌러 담아 채워주던 엄마가 더 이상 없음을. 엄마가 채워줘서 비울 수 있었던 밥 한 그릇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리움에 잠긴 밥 한 그릇, 엄마 손이 아닌 내 손으로 채운 밥 한 그릇을 비우며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비웁니다. 내가 한 그릇 뚝딱 비우면 엄마가 다시 채워주었던 것처럼 그리움은 비워도 비워도 이내 차오릅니다.

작가는 전기 스위치에 묻은 엄마의 손때, 엄마가 꾹꾹 눌러 담아주던 따끈한 밥 한 그릇, 그리고 문득 바라본 달님에게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채우고 또 비웁니다. 여러분은 일상의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악 어떤 향취에서 그리움을 문득 느끼시나요? 비워도 비워도 이내 차오르는 여러분의 그리움은 과연 어떤 그리움일까요?


문득

문득

글/그림 오세나 | 달그림
(2023/09/29)

『문득』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낡은 전기 스위치 주변에 묻은 손때를 바라보다 문득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 빠져버린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림책입니다. 누군가가 그리운 분들과 함께하고 싶은 작가의 조심스러운 초대장 같은 그림책이기도 하고요.

밥처럼 항상 있을 줄만 알았는데 이젠 그리운 밥상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달을 올려다보니, 항상 지켜보며 나를 채워 주던 엄마의 밥이 떠올랐어요. 누군가가 그리운 분들과 이 책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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