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원제: L’arrêt de bus)
그림 쥘리에트 라그랑주 | 글 나탈리 비스 | 옮김 김윤진 | 책읽는곰
(2023/07/03)


면지를 가득 채우는 점점의 보라색 보도블록이 더없이 차갑게 느껴지는 건 겨울이라는 계절 탓일까요? 차가운 보라색에 담긴 우울한 느낌 때문일까요? 어쩌면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라는 제목에서 이미 그 쓸쓸한 정서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에는 오랫동안 버스 정류장에 살았던 앙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거리를 오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 속에 있지만 모두의 관심 밖에 존재하는, 그 자리에 있지만 없는 사람이 바로 앙리 할아버지였어요.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모두들 목적을 향해 분주하게 오가는데 오직 앙리 할아버지만 정지 버튼이 눌린 듯 옴짝달싹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습니다. 잔뜩 움츠러든 그의 모습이 외롭고 쓸쓸함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어요. 버스에서 나는 온갖 기계음, 끝없이 되풀이되는 브레이크 소리, 출입문 여닫는 소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모든 것이 노출된 공간이지만 오직 앙리 할아버지만 닫힌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만 커다랗게 묘사한 장면에 눈길이 머뭅니다. 각자 자기 일을 찾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마음은 휙휙 지나쳐 가는 커다란 발로 묘사되었어요. 마치 앙리 할아버지가 등을 잔뜩 구부리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 코앞을 지나치는 발과 다리를 바라보는 것처럼요.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 누군가 찾아왔어요. 슬픔으로 가득해 보이는 아기 코끼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버스를 타지 않았고 앙리 할아버지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앙리 할아버지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기 코끼리의 존재 역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보기 마련인가 봐요. 염려스러운 마음에 할아버지는 아기 코끼리의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늘 머물던 버스 정류장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물어보았지만 돌아온 건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 냉혹한 대답뿐이었어요.

결국 둘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 그때부터 함께 지냈어요.

앙리 할아버지의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밤은 덜 추웠고,
사람들의 깔보는 시선도 덜 느껴졌어요.
기다림은 더 달콤해졌고요.
맞아요, 할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외로움이 사라진 거예요.

하지만 이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어느 날 코끼리 가족이 아기 코끼리를 찾으러 버스 정류장에 찾아왔거든요. 할아버지가 다시 외로움 속에 홀로 남겨지게 된 그 순간, 아기 코끼리는 할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조릅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여럿이… 코끼리 가족 무리에 합류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기쁨과 안도감으로 가득합니다. 늘 움츠려있던 어깨도 활짝 펴졌어요.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외로움을 품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앙리 할아버지는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라진 후에도 버스 정류장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할 거예요. 다들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할아버지는 왜 그 많은 장소 중 버스정류장에 머물렀던 걸까요? 어쩌면 너무도 외로운 마음이 그를 버스 정류장으로 인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말이죠.

외로움이란 감정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타인과의 연결이 부족한 상태를 어서 빨리 해결하라고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라고 합니다. 진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유대’가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걸 알게 된 인간은 고립의 순간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 ‘외로움’이란 감정을 유전자에 새겨 넣었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북적이는 곳에 모여살고 네트워크를 구성해 한시도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을 하려고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해지는 건, 진짜 마음이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지…

군중 속의 고독을 잘 드러내는 장소가 바로 그림책 속 ‘버스 정류장’입니다. 이 그림책의 원서 제목 역시 『L’arrêt de bus』(버스 정류장)이에요.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제목이 완전히 바뀐 부분은 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브리엘』로 처음 알게 된 쥘리에트 라그랑주는 엷은 수채화에 음영을 넣고 가늘고 구불구불한 잉크 선을 그려 넣어 독특하고 아름다운 화풍으로 그림책을 완성했어요. 그리고 수많은 이들 사이 할아버지 주변을 서성이는 빨간 줄무늬 티셔츠의 꼬마를 그려 넣어 우리에게 작은 위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글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이 작은 꼬마는 늘 할아버지 주변에 머물고 있어요. 코끼리가 왔을 때 잠깐 사라졌다 할아버지가 떠난 버스 정거장에 외로운 누군가를 찾는 듯 다시 등장해요. ‘비록 당신이 몰라볼지 몰라도 누군가 늘 당신 곁에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가의 따뜻한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바쁘게 달리던 삶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라고 말하는 그림책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아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생명과 생명이 만나 서로를 돌아보고 품어줄 수 있을 때 우린 더욱 밝게 빛날 수 있어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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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선
이강선
2023/12/08 10:13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라는 제목에 끌려서 들어왔습니다. 외로움과 외로움 사이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버스 정류장이 될 것 같습니다. 사이에는 틈이 있고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 하나에서 하나로 넘어가는 것을 말해주지요. 좋은 책을 소개하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이지영
이지영
2023/12/09 17:23

가브리엘도 너무 좋았는데 이책도 너무 기대돼요. “버스정류장”이 훨씬 멋진것 같은데 저도 좀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우리나라는 책제목도 뭔가 좀 겉으로 드러나게 짓는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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