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금요일 오후, 일주일을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골목마다 가득한 인파,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들, 심지어 수로조차 작은 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숨막힐 듯한 도시의 금요일 오후 풍경, 저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내 머리는 꽉 차서 터질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엔 내 머릿속에는 남는 자리가 별로 없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아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일주일 내내 공부와 어른들의 잔소리에 치인 탓이겠죠. 숫자들이 뒤엉키고, 외워야 할 전투와 강 이름들은 거대한 공룡 이름들과 뒤섞이고, 시 한 편과 노래 세 곡에 구구단까지 외워야 하니… 아이 말대로 금요일 오후엔 머릿속에 남는 자리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거 내 놔! 내 방에서 나가!”, 아이는 어제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면박만 당했습니다. 누나에게 뭔가 물어볼 게 있었을 수도 있고, 그냥 예전처럼 누나랑 놀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붙여 보고 쫓겨났거든요. 물론 그건 아이 입장이고 저학년인 동생의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 고학년인 누나 머릿속은 오죽 복작댔을까요. 동생이 무작정 귀찮고 싫은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었겠죠.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도 과부하에 걸린 건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아이가 차 문을 열기도 전에 “가브리엘! 어서 타렴!”하고 소리 질러 독촉부터 합니다. 차를 몰고 시내를 빠져 나가는 내내 엄마는 정신없이 돌아간 오늘 하루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딸아이 수학여행과 아빠 출장을 동시에 챙겨야 했고, 일하다 말고 아이 픽업하러 달려와야만 했대요. 샤워기에서 물 새는 것 때문에 걱정,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는 옆집 할머니 때문에 걱정… 해야 할 일도 많고 걱정할 일도 잔뜩인 엄마… 아이에게 “오늘 하루 어땠어?”하고 물어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아이와 엄마 둘은 지금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입니다. 누나는 수학여행 가고 아빠는 출장을 가서 둘만 남은 주말 동안 할아버지랑 보내려구요. 자동차가 한적한 시골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아이는 오늘이 금요일인 걸 깨닫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금요일이 아니라 푹 쉴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주말을 앞둔 바로 그 금요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TGIF! 🤩🍻

“저게 은하수란다.
그리고 저건 카시오페이아고…”

나는 하늘을 맘껏 들이마셨다.
머리와 가슴과 두 귀를 활짝 열고서.
고요 속에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말이다.
별들의 얘기를 듣고, 숲의 얘기도 들었다.

숨막히는 도시에서 벗어난 한적한 시골의 밤하늘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아이 머릿속에 작은 여유 공간을 만들어준 건 바로 할아버지의 이 한 마디 아니었을까요? “저게 은하수란다. 저건 카시오페이아고…”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잔소리도 아니고, 뭔가를 생각하거나 깨우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저건 은하수고 저건 카시오페이아라는 말 한 마디.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별빛 가득한 푸른 밤하늘. 이제야 아이의 머리와 가슴과 두 귀가 활짝 열립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얘기에 귀기울이고, 별들의 얘기, 숲의 얘기에도 귀기울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오늘, 어떤 금요일, 어떤 주말을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의 머릿속엔 아직 여유 공간이 남았나요? 아니면 그림책 속 꼬마처럼 곧 터져버릴 것만 같나요? 복작거리는 도시에서 벗어나 텅 빈 시골 밤하늘을 선택한 주인공처럼 여러분만의 쉴 곳 쉴 방법 하나쯤 만들어두셨나요? 아직 없다면 우선 급한대로 이 그림책 “가브리엘” 한 번 펼쳐보세요. 쥘리에뜨 라그랑주의 그림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가브리엘

가브리엘

(원제: Gabriel)
마일리스 도프레슨 | 그림 쥘리에뜨 라그랑주 | 옮김 박선주 | 바이시클
(2022/03/21)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하던 시대는 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나 ‘비우기’가 대세인 시절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빡빡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겠죠. “가브리엘”은 그런 우리에게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즐기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그림책입니다. 넉넉한 미소로 옆자리를 지켜주는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의 푸른 밤하늘을 만끽하는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가브리엘”의 주인공 꼬마는 시골의 푸른 밤하늘 말고도 여유를 찾는 한 가지 팁을 더 알려줍니다.

나는 머릿속에 아주 작더라도 여유 공간을 하나 만들어 보려고 했다.
쉬는 시간에 딴 구슬을 문질러 봤다.
표면이 아주 매끄러웠다.
빛깔은 내가 여름마다 찾아가는 바다와 같은 색이었다.
바다가 날 가만가만 흔들어 주었다.

정체된 시내 도로 위 차 안에서 아이는 주머니 속 구슬을 만지작 거리며 잠시나마 여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매끄러운 표면, 여름마다 찾아가는 바다와 같은 빛깔의 구슬을 가만히 문지르고 있으면 바다가 날 가만히 흔들어 주는 것 같다면서 말이죠.

시골 농장으로 언제든 달려갈 수 있다면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죠. 바다 빛깔을 닮은 아이의 구슬처럼 일상 속에서 여러분만의 구슬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구슬은 아마도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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