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랄다와 거인

제랄다와 거인

(원제: Zeraldas Riese)
글/그림 토미 웅거러 | 옮김 김경연 | 비룡소
(1996/05/01)

※ 원작 1970년 초판 출간


날카로운 칼을 들고 우악스런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거인, 그 앞에 작은 생쥐가 피 묻은 접시 위에 놓여있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거인 곁 어린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표지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이 그림책은 1970년에 초판이 출간된 토미 웅거러의 『제랄다와 거인』입니다. 당돌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는 아이가 바로 제랄다예요.

제랄다와 거인 사람 잡아먹는 거인, 그중에서도 아침밥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걸 제일 좋아하는 거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어요. 아이들은 거인을 피해 지하 비밀 장소에 숨어 지내야 했고 아이들이 없으니 학교는 텅 비어 버렸습니다. 도망치거나 놀라 기절하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쑥대밭이 된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는 거인의 표정에 눈길이 머뭅니다. 이 모든 불행에 대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듯이…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숨어버리자 거인의 식사는 형편 없어졌어요. 귀리 죽이나 미지근한 양배추, 찬 감자 요리로 하루하루 끼니를 때워야 했죠. 그럴수록 거인은 맛난 요리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더 커져갔습니다.

텁수룩한 털로 덮인 몸, 튀어나온 눈 코 입, 검붉은 피, 어두컴컴한 거인의 집, 음습하고 칙칙한 배경은 거인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거인에게 시달리는 마을 역시 별다를 바 없어요. 아이들은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컴컴한 어둠 속에 숨었고 어른들은 자포자기한 모습입니다. 잡아먹는 이도 잡아먹히는 이도 모두 정서가 메마르고 날카롭기는 매한가지예요. 자라나는 생명이 사라진 세상의 정서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제랄다와 거인

제랄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골짜기 숲속에서 농부인 아버지와 살고 있었어요. 초록으로 가득한 숲속 소박한 농장은 생명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제랄다는 각종 재료로 요리하는 걸 아주 좋아했어요. 요리 재료가 넘쳐나는 온기 가득한 부엌에서 요리책을 보고 있는 제랄다의 표정은 평온해 보입니다. 텅 빈 창고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차갑고 퍽퍽한 음식으로 그저 살기 위해 배를 채우는 거인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에요.

거인의 파괴와 혼돈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온화하고 평화로운 제랄다의 세상을 소개한 작가 토미 웅거러는 둘로 나뉘었던 세계를 이제 하나로 합쳐 보여줍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날뛰는 거인과 다정하고 친절한 제랄다의 만남은 마치 숙명 같은 우연이었어요.

일 년에 한 번 읍내에 물건을 팔러 가는 날,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제랄다는 집을 나섭니다. 이때 배고픈 거인은 길목 바위 뒤에 숨어 잡아먹을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인이 숨어 있는 바위가 차갑고 거칠고 음울한 검은빛으로 가득하다면 제랄다의 길은 초록초록한 빛으로 가득한 밝은 세상이에요. 이렇게 둘이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음과 양 색채의 대비로 두 사람의 성품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랄다와 거인

힘의 논리로만 보면 당연히 제랄다가 거인에게 상대가 되지 않겠지요. 그런데 삶이라는 게 꼭 그렇게 공식처럼 진행되지만은 않아요. 그게 삶의 아이러니면서 또 묘미이기도 합니다. 굶주린 거인은 제랄다를 잡아먹을 생각에 흥분해서 허둥대는 바람에 바위에서 미끄러져 그만 기절을 해버렸어요. 그런 와중에도 배고프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거인이 안쓰러웠던 제랄다는 장에 내다 팔려던 것들로 뚝딱 요리를 해서 거인 앞에 내놓았어요.

생전 처음 먹어본 음식 맛에 반한 거인은 더 이상 어린아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제랄다의 요리 솜씨 덕분에 이제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놀 수 있게 되었어요.

제랄다와 배고픈 거인이 만나는 장면은 그림책에서 최고의 긴장감을 안겨줍니다. 그렇게 잔뜩 긴장했던 마음은 이어지는 장면들로 이제까지의 긴장을 사르륵 풀어내며 웃음 짓게 만들죠. 신나게 통돼지 바큐를 하던 제랄다가 쓰러진 거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데 이 광경을 당나귀와 새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요(‘다음엔 혹시 나?’하는듯한).

새 사람이 된 거인의 손엔 칼 대신 달콤한 사탕이 들려있습니다. 사탕을 받으려고 몰려든 아이들 틈에 끼어 강아지도 잽싸게 사탕 하나를 차지했고요. 거인을 피해 땅속 깊이 숨었던 아이도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웃고 있습니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세상은 제랄다의 밝은 기운으로 환해졌습니다. 칼 든 손을 사탕 든 손으로 바꾼 건 조건 없이 베푸는 마음, 친절한 마음, 사랑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제랄다는 거인과 결혼해 재미있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림책의 첫 문장 ‘옛날에 마을 잡아먹는 거인이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와 완전히 대조되는 결말이에요.

글로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마무리했지만 토미 웅거러는 그림 속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숨겨놓았습니다. 남편과 네 명의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인 제랄다, 언뜻 보면 더없이 행복한 장면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 아이 중 한 아이가 등 뒤에 칼과 포크를 숨기고 갓 태어난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거인과 제랄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중 한 명이 등 뒤에 칼과 포크를 숨긴 채 동생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사라진 줄 알았던 악의 씨앗은 언제든 다시 발현될 수 있으니 우리는 이를 잊지 말고 서로를 잘 보듬어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전 제랄다가 그랬던 것처럼요. 물론 그저 갓 태어난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긴 아이의 마음을 표현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고요. 모두가 갓 태어난 동생을 예뻐하고 있는데 이 아이와 강아지만 못마땅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거든요. 여러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토미 웅거러식 화법입니다.

대조되는 두 캐릭터를 통해 통합된 인간상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그림책 『제랄다와 거인』, 이 그림책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피해 지하실에 숨어 지내야 했던 토미 웅거러의 끔찍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커다란 판형의 그림책을 다시 바라봅니다. 이 커다란 그림책은 거인마저 품을 수 있는 제랄다의 커다란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 오랜 그림책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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