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감나무

할아버지의 감나무

글/그림 서진선 | 평화를품은책
(발행 : 2019/01/15)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엄마에게”를 썼던 서진선 작가가 이번에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담은 그림책 “할아버지의 감나무”를 내놓았습니다.

주인공 소년의 할아버지는 평생을 감나무를 심고 가꾸며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내다 팔지도 않을 거면서 뭘 그리 정성스레 돌보냐고 잔소리들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묵묵히 당신 할 일을 할 뿐입니다. 할아버지의 감나무에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이름표가 걸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누구냐고 물으면 그저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소년은 오래된 앨범 한 권과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소년은 할아버지가 오래 전에 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할아버지가 왜 그리도 열심히 감나무를 심고 돌보았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작업하는 내내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에 나가셨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군대에서 나와 영암 산골에 들어가 감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시장에 내다 팔지도 않을 거면서 감나무는 무엇하러 힘들게 심느냐며 어머니는 아버지를 감나무 산에 못 가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그토록 말리셨는데도 아버지는 혼자 감나무를 키우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군대 이야기, 전쟁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하셨던 아버지가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 해 봅니다. 우리 자손들은 총을 들고 싸우지 않기를, 다시는 전쟁의 고통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만을 바라셨을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보았습니다.

전쟁으로 고통 받은 분들과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나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작가의 말

이야기 속에서 일생동안 묵묵히 감나무를 심고 키우셨던, 손자의 장난감 총에 지나치게 놀라시던,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자 평생 아파하고 죄스러워했던 할아버지는 서진선 작가의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북한군 소년의 손에 쥐어진 감

할아버지의 감나무

1950년 11월 16일

새벽부터 산속에 숨어 있는 적군 수색 작전에 들어갔다. 산세가 깊고 안개가 자욱해서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들어갔는데, 인기척이 들려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가 보니, 어른 북한 군복을 입은 소년이 죽어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먹다 남은 감이 쥐여 있었다. 얼마나 굶었는지 바싹 말랐는데, 그 야윈 몸에 자기 키만 한, 실탄도 없는 총을 메고 있었다.

소년의 주머니엔 어머니에게 쓴 편지도 들어 있었다. 김의수, 소년의 이름이다. 하루 종일 소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1950년 12월 30일

한 해가 다 저물어 간다. 적군뿐 아니라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 가여운 아이들까지 헤아릴 수 없이 죽어 간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 저도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괴롭고 힘든 제 마음을 어머니는 알아주시겠지요.

어머니…
– 할아버지의 일기장 중에서

전쟁의 엄혹함이 무겁게 내려앉은 하얀 눈밭 위에 먹다 남은 감 한 알이 떨어져 있습니다. 살기 위해 내지른 총알에 누군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감 한 알로 생명을 부지하려던 소년의 목숨입니다. 채 다 먹지도 못한 감 한 알은 죽은 자의 심장에 박힌 총알보다 더 아프게 쏜 자의 가슴에 박힙니다.

살아남기 위해 싸웠지만 자신의 손에 묻은 피에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 잔혹한 살육의 총성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어머니에게만이라도 자신의 부서진 영혼을 위로받고 싶은 할아버지의 기도는 오래전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이들 모두의 절규입니다.

이름표가 달린 할아버지의 감나무

할아버지의 감나무

할아버지는 감나무에 이름도 붙여 주셨다. 왜 감나무에 이름표를 걸어 주냐고 물었더니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고만 하셨다.

감 한 알로 새벽의 허기를 채우려다 죽어간 북한군 소년 김의수, 나의 옆에서 적진을 향해 함께 돌진하던 전우들, 억울하게 죽어간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 할아버지는 감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심을 때마다 거기에 그들의 이름을 걸어주었습니다.

길고 긴 세월이 흘렀건만 할아버지의 가슴에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는 아물지를 못하고, 그 상처에 새겨진 이들의 이름과 얼굴들은 매일 밤 할아버지의 꿈을 어지럽혔을 겁니다. 감나무를 심고 거기에 그들의 이름을 걸어주는 것은 할아버지만의 씻김굿이고 진혼곡이었던 겁니다.

감나무에 열린 감 한 알 한 알마다 머금은 평화

할아버지의 감나무

소년은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집어들고 할아버지에게 “손 들어!”하고 외쳤을 때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했었는지를.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감나무를 심고 돌보는 일에 집착하셨었는지를.

이 땅 위 그 어디 그 누구도 다시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온세상 아이들 모두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며 자신만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로이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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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호

이 인호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 수다에 체력 고갈되어가는 아내를 18년째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남편. 한때 아내가 쓴 딸아이 육아일기에 '396개월 남아'로 등장했었던 그 남아. 그림책 좋아하는 542개월 남아로 폭풍 성장 중 ^^ | 2015년 7월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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