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훨 간다

훨훨 간다

권정생 | 그림 김용철 | 국민서관
(2002/04/21)


이 그림책 읽을 때면 장면마다 아이랑 동작 따라 하면서 웃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첫 출간 날짜를 확인하고는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사이 세상이 이렇게 변했구나 생각하다 놀라고 그 오랜 시간에도 이야기가 주는 매력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또 놀랐습니다.

어렸을 때 아빠가 해주셨던 재미난 옛날이야기의 하나로 기억되는 이 이야기의 원본은 ‘이야기로 쫓은 도둑’ 또는 ‘도둑 쫓는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우리 옛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다듬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시 만드셨어요. 그렇게 이야기는 세월 따라 조금 모양을 바꾸어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게 되었지요.

훨훨 간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할머니, 이야기라는 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할아버지. 두 분만 사는 산골 외딴집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입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정성껏 짠 무명 한 필을 할아버지에게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영감, 오늘 장에 가서 이 무명 한 필하고 이야기 한 자리하고 바꿔 오세요.”

무명 한 필과 이야기 한 자리를 바꿔오라는 할머니의 제안 덕분에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 생겨나게 되었어요. 할머니의 부탁에 순순히 이야기 사러 무명 한 필 들고 장에 간 할아버지 덕분이기도 하네요. ^^

하지만 이야기를 얻기는 쉽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무명을 사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야기 한 자리를 낼 사람은 없었거든요. 결국 장이 파하자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던 할아버지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한 농부 아저씨가 할아버지의 무명에 관심을 보였어요. 이야기 한 자리에 판다는 말에 농부는 선뜻 자기가 사겠다고 말했어요.

훨훨 간다

농부는 건너편 논에 날아든 학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학이) 훨훨 온다 – (학이 논바닥을) 성큼성큼 걷는다 – (학이) 기웃기웃 살핀다 – (우렁이를 발견한 학이) 콕 집어 먹는다 – 예끼, 이놈! – (놀란 학이) 훨훨 간다.

한 구절이라도 놓칠세라 할아버지는 농부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반복되는 말과 생생한 동작이 하도 재미있어서 보는 이도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때는 농부와 할아버지, 두 번씩 반복되는 구절과 동작을 따라 하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정성 들여 짠 무명을 내어주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다시 웃음을 선사합니다. 한껏 기대에 찬 할머니의 표정은 또 어떻구요. 이제 막 세상에 생겨난 이야기가 또다시 새 주인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훨훨 간다

어느 마을 논자락에서 탄생해 산골 할아버지의 외딴집으로 들어온 이야기, 똑같은 이야기가 장소와 대상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세요.

농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번에는 할머니가 이야기를 따라 합니다. 방문 밖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만 비추는 어스름 달밤, 초가집 방문 밖으로 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사립문 밖엔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살금살금 초가집 다가오고…

도둑이 훌쩍 담을 넘어 들어오는데 들려오는 이야기는 ‘훨훨 온다’, 성큼성큼 숨어드는데 ‘성큼성큼 걷는다’, 화들짝 놀란 도둑이 부엌에 숨어 기웃기웃 살피는데 ‘기웃기웃 살핀다’, 누군가 다 보고 있다는 생각에 도둑은 그만 간이 콩알만 해졌는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예끼, 이놈!’ 소리에 소둑은 그만 줄행랑을 치고 말았어요. ‘훨훨 간다’는 이야기에 맞춰 도둑은 훨훨 가버렸지요.

짧고 단순한 말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는 상황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되어 누군가에는 큰 웃음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눈물 쏙 빼는 무서운 이야기가 되었으니 이야기 한 자리의 가치가 참 대단하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이야기를 사오라며 무명 한 필 선뜻 내준 할머니?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 낸 빨간코 농부 아저씨? 우여곡절 끝에 이야기를 사 온 할아버지?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에 따라 장소에 변신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아닐까요.

주인공이 누구건 잊지 말고 앞뒤 면지까지 꼼꼼히 살펴보세요. 사립문 밖에 몰래 숨어있는 도둑은 마치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보조 출연자 같은 느낌입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는 뒷면지 도둑 모습은 도둑의 시점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 같으니 그건 또 어떤 이야기가 될지 궁금해집니다.

이야기가 도둑을 물리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즐겁게 할 수 있었으니 이야기가 꿈틀꿈틀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있다는 말이 실감 나는 그림책 “훨훨 간다”. 꼬불꼬불 선으로 그린 정겨운 풍경들, 다정한 인물들, 할머니의 손때 묻은 베틀이며 할아버지의 곰방대, 망태기, 등잔불, 말린 옥수수, 싸리 울타리까지도 생생한 생명력을 갖고 이야기에 힘을 더하고 있습니다.

행복이 별 건가요? 가진 것 아낌없이 내어 가지고 싶은 것 가지고 실컷 웃고 즐기면 되는 것을… 여러분, 행복하세요!


내 오랜 그림책들

테마 : 세상에 이야기가 생겨나게 된 이야기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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