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허물다

담장을 허물다

허름한 집이 한 채 서있습니다. 담장은 다 무너져 내려앉고 삐걱 거리는 대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오래된 집, 홀로 서있는 집의 모습이 처량해 보입니다. 고향에 내려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울어진 담장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낸 일이었어요. 담장이 사라진 소박한 집, 작은 툇마루에 앉으면 어린 아들이 훌훌 불어 날린 민들레 씨앗이 멀리까지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작은 집,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버린 홀가분한 모습입니다.

담장을 없애자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집 앞 텃밭 수백 평이 나의 정원이 되었어요. 텃밭 아래 백 살 된 느티나무는 그늘 수 십 평과 함께 둥지 튼 까치집이며 새소리까지 모두 가지고 내 집으로 들어왔어요. 담장이 사라진 앞 마당에 들고 나는 노루도 멧돼지도 토끼도 모두 내 친구, 저 멀리 풍년초 꽃으로 덮인 언덕 과수원이며 구름과 해와 별들이 담긴 연못도 모두 나의 정원으로 들어왔습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의 정원으로 내놓으라고
나중에 보령 군수와 다투어볼 참이다.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마을을 정원으로 갖게 되었다.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온 온갖 풍경과 계절과 숲 속 친구들, 흙집 담장 속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정원을 갖게 되자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까지 정원으로 내놓으라고 보령 군수와도 다투어 볼 요량인 주인공의 여유로운 넉살이 마냥 부럽습니다.


담장을 허물다
책표지 : Daum 책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 그림 김슬기 | 바우솔
(발행 : 2017/06/23)

오늘 소개한 “담장을 허물다”는 2013년 공광규 시인이 펴낸 시집 “담장을 허물다”에 수록된 시로 만든 그림책이에요.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 공광규 시인의 마음이 맑게 그려져 있는 시입니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찾아간 고향 땅에 남아 있는 것은 낡고 초라한 집 한 채입니다. 집 한 채만 덩그러니 그려진 그림이 지은이의 마음처럼 쓸쓸해 보입니다. 담장을 허물고 나자 작은 집은 다양한 것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으로 변해갑니다. 경계를 허물어 낸 자리가 점차적으로 더 크고 깊게 채워지면서 마침내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고향이 되어가는 과정을 차분한 색채로 표현한 김슬기 작가의 판화 그림은 시를 더욱 풍요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버릴수록 풍성해지는 삶의 원리를 아름답게 그려낸 그림책 “담장을 허물다”, 복잡한 세상 속에 비움의 철학을 명료하게 그린 그림책입니다.


이 선주

이 선주

열여덟 살 딸내미와 폭풍수다에 체력 고갈 중 | 2000년부터 육아, 그림책,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 중학교 3년간의 홈에듀케이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 '찾아가는 어린이 책놀이터' 수업 진행 |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출간(2007) | 2016년 4월 | seonju.lee@gaonbit.kr

2 Replies to “담장을 허물다

  1.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 앞에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느 시인의 시(詩)에 실린 문장이 떠오르네요…ㅎㅎ

    나는 오늘 지식들을 채우려고 발버둥대고…
    나는 오늘도 여전히 바깥쪽을 향해 난 문들을 모두 걸어잠구는데…

    대문도 없이, 현관문도 없이,
    창호지로 된 미닫이 방문 하나에 의존하고 살았던
    어릴적 옛 시골집이 그리워지는 오늘입니다…

    1.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가을에 참 좋은 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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