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달력

파릇파릇하게 생기가 돌기 시작하던 세상이 어느새 푸른빛으로 가득합니다. 얼마 전 망종(芒種)이 지나갔습니다. 24절기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인 망종은 보리를 베고 논에 모를 심기 알맞은 때라고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풀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구요.

풀숲에 가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요놈도 풀, 저놈도 풀, 휙휙’ 바지런히 손을 놀리며 풀을 뽑는 그림책 속 할머니 모습에 오래전 우리 집 풍경을 떠올립니다. 정겨운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할머니를 추억합니다.

집 근처 작은 텃밭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온 할머니 손은 언제나 풍성했어요. 정성으로 키워낸 풋고추며 상추, (울퉁불퉁 못생긴) 오이, 가지, 애호박, 부추, 토마토… 작은 텃밭은 정직합니다. 보살펴 준 만큼 아낌없이 내어주는…

새벽같이 작은 텃밭으로 향하던 할머니, 반나절만 한눈을 팔아도 애써 가꾸는 작물보다 잡초가 더 많아진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벌레 무서워, 땡볕 무서워, 잡초가 할퀼까 봐 무서워… 한 번도 따라가지 않았던 할머니의 텃밭 풍경을 뒤늦게 그려봅니다.

아침나절에는 풀을 매고 오후에는 말려둔 풀을 모아 태우고, 여름은 농부에게 가장 바쁜 계절입니다. 풀과의 전쟁, 벌레와의 전쟁, 그 와중에도 신난 강아지 동구 모습에 함박웃음을 짓고, 조롱조롱 달려 나온 감자를 보면서 부자가 된 기분에도 젖어 봅니다. 넉넉한 풍경에 내 마음도 풍성해집니다. 평화로워집니다.

무엇이든 무럭무럭 자라나라고 해님도 오래오래 이 땅 위에 머무는 계절, 뙤약볕 아래 작물이 자라납니다. 잡초도 자라납니다.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농부 달력

농부 달력

글/그림 김선진 | 웅진주니어
(2022/03/22)

김선진 작가의 그림책은 언제 보아도 다정합니다. 억세게 소리 내지 않고 요동치지 않습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어느새 수평선 너머로 데려다 놓습니다.

농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 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집착하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내게 주어진 것을 순리대로 해나가며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삶은 정직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달력처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계절을 느끼고 자연을 느끼며 마음을 힐링하게 되는 그림책 “농부 달력”, 농부의 마음처럼 이 계절을, 이 시간을 살아냅니다. 오늘을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 함께 읽어 보세요 : 알레나의 채소밭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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