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색 다 바나나

이 색 다 바나나

(원제: These Colours Are Bananas)
제이슨 풀포드 | 그림 타마라 숍신 | 옮김 신혜은 | 봄볕
(2022/05/28)


초록, 연두, 노랑, 짙은 노란색 위에 살포시 얹어있는 바나나, 이것도 바나나, 저것도 바나나,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본질은 모두 같은 “이 색 다 바나나”. 표지만 보고도 ‘오!’하고 터져 나오는 감탄사, 군더더기 없이 다가오는 메시지가 명쾌합니다.

이 색 다 바나나

사과가 항상 빨간 건 아냐.

이런 색도 있어.
그래니 스미스 사과 먹어 본 적 있어?
핑크 레이디 사과는?
아님 골든 딜리셔스 사과는?

사과 = 빨강

공식처럼 떠오르는 생각을 걷어냅니다. 아, 그래 맞아 맞아… 초록색 사과도 있고 빨간 사과도 있고 노란 사과도 있었지. 꼬리를 물고 내가 아는 사과를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초록은 아오리, 빨강은 양광, 홍로, 부사. 작년에 시나노 골드라는 품종의 노란 사과를 선물 받아 처음 먹어보았어요. 보기엔 (살짝) 볼품없었는데 제가 딱 좋아하는 새콤달콤 아삭한 맛에 반해 한동안 시나노 골드만 먹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래니 스미스 사과는 무슨 색이지, 핑크 레이디 사과는 분홍색인가? 골든 딜리셔스 사과라는 것도 있구나. 열심히 구글링을 해가며 사과를 찾아보았어요. 노란 것도 사과, 초록도 사과, 빨간 색도 사과. 사과는 사과. 색깔이 달라도 아삭아삭 사과 향기를 풍기는 이 색 다 사과.

이 색 다 바나나

‘풀 = 초록’을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풀은 항상 초록색은 아니야’라고 쓴 페이지를 노란색으로 칠해 두었습니다. 옆에 나란히 놓아둔 25가지 색상 팔레트를 바라보는 두 눈이 동그래집니다.

‘분홍색 풀이 있다고?’ 구글링을 해보니 제일 먼저 나오는 게 핑크뮬리, 아하 하고 웃었어요. 같은 자리에 모여 난 풀도 어떤 건 더 진하고 어떤 건 좀 흐리고, 가만히 보면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 언제 어느 시각에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풀도 각기 다른 색이지요.

차례 차레 넘기면서 만나는 여러 가지 색깔의 구름, 장미, 불, 흙, 얼음…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고정관념이 하나씩 깨어지고 그 깨어진 자리에 더 많은 것이 차오릅니다. 그림책 한 장 한 장 감상하면서 넘기는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어요. 똑같아 보이지만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존재. 우리는 그런 존재.

이 색 다 바나나

푸르스름-노르스름-누르스름-거무스름, 하나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시시각각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 푸르스름해서 당당하고 노르스름해서 반갑고 누르스름해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바나나. 어느 색깔이라도 바나나는 바나나. 이 색 다 바나나!

마지막 페이지의 비워둔 칸 아래 살며시 내 손을 갖다 대어보았어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나 고유의 색깔이 주변 색깔과 어우러집니다.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는 더 아름답습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존재를 규정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나는 세상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짧고 깊은 철학적 사유를 전하는 그림책 “이 색 다 바나나”, 고정관념을 벗고 바라보면 더 넓고 더 깊은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이 수많은 색깔로 넘쳐흐릅니다. 아, 좁디좁은 시야, 이 편협한 생각! 그림책 한 권이 내 마음을 툭 건드립니다. 생각을 쨍 깨트립니다.


※ 함께 읽어 보세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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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이맘
쟌이맘
2022/06/24 08:33

<어린이라는세계>과 함께한 북클럽에서 누군가도 인상깊게 읽었다 말하셨던 그 챕터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와도 결이 같은 그림책이네요, 마침 지난주 한겨레에서 김소영 작가님의 <책&생각>에서도 이 책 소개됬었어요. 가온빛과 어린이라는 세계, 또 그렇게 한번 더 연결고리 제 맘대로 이어봅니다 ㅎㅎ 어제 leo lionni 작가의 frederick and his friends (작가님의 그림책 네 편 모음집) 읽으며 선생님 생각났어요. 거의 가온빛앓이 수준? ㅎㅎ 즐거운 금요일,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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