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냉장고
책표지 : 한솔수북
텅 빈 냉장고

(원제 : Frigo Vide)
글/그림 가에탕 도레뮈스 | 옮김 박상은 | 한솔수북

가온빛 추천 그림책
2015 가온빛 BEST 101 선정작
※ 2015년 볼로냐 라가치상 ‘Book & Seeds’ 상 수상작

※ 볼로냐 라가치상은 Fiction, Non Fiction, New Horizons, Opera Prima 총 4개 부문으로 나눠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책 “텅 빈 냉장고”가 수상한 ‘Book & Seeds’ 상은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엑스포를 개최하는 기념으로 제정한 특별상입니다.


텅 빈 냉장고

한 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리의 악사 앙드레이 할아버지는 쉼 없이 악기를 연주했고, 나빌 아저씨는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탔습니다. 뤼시 아주머니네는 온가족이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고, 로진 할머니는 베란다에서 계속 전화를 했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잔뜩 풀이 죽은 클레르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가 그녀에게 얼마나 힘겨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렇게 하루의 삶을 살아내고 따끈한 저녁 식사와 푸근한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다들 바쁜 하루를 보내느라 아무도 먹을거리를 사지 못했습니다.

텅 빈 냉장고

앙드레이 할아버지에겐 달랑 당근 세 개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웃 나빌 아저씨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나빌 아저씨의 냉장고도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녁으로 먹을 달걀 두 개와 치즈 한 조각뿐이었죠. 완두콩 몇 알이라도 빌려보려 했던 앙드레이 할아버지나, 아무것도 나눠줄 게 없는 나빌 아저씨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빌 아저씨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삼 층에 가 보자고요. 다른 재료들이 더 있으면 맛있는 그라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는 나빌 아저씨는 앙드레이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끌고 윗층으로 향합니다.

텅 빈 냉장고

그렇게 아파트 사람들은 각자의 텅 빈 냉장고 안에 남아 있는 음식 재료를 조금씩 모으며 한 층 한 층 올라갑니다. 그리고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그들의 재료는 점점 다양해집니다. 마침내 맨꼭대기층에 사는 로진 할머니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당근 세 개, 달걀 두 개, 치즈 한 조각, 피망과 쪽파 조금, 토마토 다섯 개, 버터와 우유, 그리고 밀가루까지 준비되었습니다.

살림살이에 연륜이 깊은 로진 할머니는 이 정도 재료라면 맛있는 파이를 만들어서 다 함께 나눠 먹을 수 있겠다며 모두에게 제안합니다.

“옳지, 이 재료들로 파이를 만들면 어때요?
밀가루를 반죽해서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되잖아요.
자, 어서요! 필요한 건 다 있어요.”

로진 할머니의 “필요한 건 다 있어요!”란 말이 참 기분 좋게 들리지 않나요? 배고픔에 염치 불구하고 이웃의 문을 두드렸던 앙드레이 할아버지,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힘겨운 하루를 보낸 클레르 아가씨, 그리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해 주는 한 마디 말 아닌가 싶습니다. “걱정하지 마! 필요한 건 다 있어! 힘 내!” 라고 말입니다.

텅 빈 냉장고

꼬마 쥘리가 빵틀에 버터를 바르고,
나빌 아저씨가 밀가루와 달걀을 섞어 반죽했어요.
로진 할머니는 오븐을 미리 데워 놓았죠.
모두 사이좋게 재료를 썰고 다지며 함께 파이를 만들었어요.
소금과 후추를 살살 뿌리고 치즈를 곱게 갈아 올린 다음
파이를 오븐에 넣었어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텅 빈 냉장고

당근 세 개 뿐이었던 앙드레이 할아버지도, 토마토 다섯 개 뿐이었던 클레르 아가씨도, 피망과 쪽파 뿐이었던 뤼시 아주머니네도 이젠 맛있는 파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웃들이 조금씩 재료를 모아 정성스레 만든 파이가 참 먹음직스럽습니다.

그림책 표지에 층별로 색깔이 다른 아파트 그림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아마도 이 장면이 그 해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집인것처럼 보이지만 벽과 벽으로 막힌 채 소통 없이 살아가는 아파트, 하지만 내 마음 문을 활짝 열면 바로 가까이에서 이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각박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다양한 재료들이 모여 먹음직스러운 파이가 만들어지듯이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의 삶이 어우러져 정겹고 훈훈한 이웃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텅 빈 냉장고

다같이 오븐 속에서 파이가 구워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두 베란다로 달려가보니 아파트마다 맨 꼭대기층에 사람들이 모여 아주 특별한 파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리마다 광장마다 커다란 테이블에 사람들이 둘러앉아서는 파이를 나눠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정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서로 마주 보며, 마음을 열고 이야기했으니까요.
“내일도 오늘처럼 다 함께 밥 먹을까요?”

텅 빈 냉장고

파이도 나눠 먹고 이웃간의 삶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게 된 기쁨에 푹 빠진 앙드레이 할아버지, “내일도 오늘처럼 다 함께 밥 먹을까요?”라며 행복에 겨워했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앙드레이 할아버지의 꿈이었을 뿐입니다. 할아버지에게는 여전히 당근 세 개 뿐이었어요.

실망한 채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는 앙드레이 할아버지의 쓸쓸한 모습…… 바로 그 때 어디선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빌 아저씨의 목소리였어요.

“앙드레이 할아버지! 저녁 같이 드실래요?”

텅 빈 냉장고

이웃의 따뜻한 부름에 활짝 웃으며 달려가는 앙드레이 할아버지의 모습, 이웃의 따뜻한 목소리를 기다리는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의 오른 쪽 여백이 우리 자신의 그림으로 채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이겠죠? 마음을 활짝 열고 이웃을 따뜻한 음성으로 불러 주고 기다리는 바로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이웃들과의 멋진 시간이 그저 꿈이었다는 반전,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도 앙드레이 할아버지를 불러주는 따뜻한 이웃의 목소리가 있다는 또 한 번의 반전을 통해 이야기의 재미와 진솔함 그리고 포근함까지 더욱 크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가의 감각이 돋보입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이웃, 그런 이웃끼리 재료와 정성을 모아 맛있는 먹거리를 만들고 오순도순 나눠 먹는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의 기쁨과 슬픔, 삶의 행복을 함께 나누는 모습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그림책 “텅 빈 냉장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