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정원

지하 정원

글/그림 조선경 | 보림
(발행 : 2005/06/15)


오가는 길목에 놓인 커다란 눈사람이 진흙탕이 되어 지저분해진 거리를 환히 밝혀줍니다. 코와 눈을 만들려고 일부러 당근도 내어온듯하고 까만 콩도 준비해 온 모양입니다. 미끄럽고 질퍽거리는 길 때문에 짜증 나던 마음이 한순간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누군가는 눈이 내린다며 이 길을 서둘러 걸어갔을 테고 ‘또 눈이야?’하며 나처럼 투덜댄 이도 있었겠죠. 어떤 이는 골목길을 쓸고 또 어떤 이는 바지런히 눈을 굴려 정성스럽게 눈사람을 만들어 놓기도 했구요. 투덜대던 내 마음이 미안해집니다. 오도카니 놓여있는 눈사람을 보며 조용히 이 계절을 느껴봅니다.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 무언가를 생생히 빛나게 하는 법을 알고 주변에 온기를 불어넣는 그런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지요. 냄새나는 지하 터널에 지하 정원을 만든 모스 아저씨처럼요.

지하 정원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올 무렵 모스 아저씨는 나갈 채비를 합니다. 창문을 닫고 햇볕을 쬐라고 내놓았던 화분도 안으로 들여놓았어요. 매일 저녁 아저씨가 가는 곳은 지하철역, 아저씨는 그곳에서 청소부로 일합니다. 지은지 오래되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낡은 지하철역을 아저씨는 늘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청소합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가 떠오르곤 합니다. 짙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 그 밤하늘에 노란빛으로 반짝이는 달과 별. 밤하늘의 짙푸른 색과 거리의 노란색이 명쾌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요. 노란 전등불을 밝힌 거리의 집들이 내부와 테라스까지 모두 밝은 노랑으로 환하게 물든 고흐의 카페 테라스를 연상시킵니다.

지하 정원

어느 날 아저씨는 막차를 기다리던 사람들로부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어요. 막차가 떠나고 나서 아저씨는 지하철이 들어오는 터널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리고 어두운 터널 저쪽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날부터 아저씨는 지하철역 청소가 끝나면 어두운 터널 청소를 하기 시작했어요. 바닥에 고인 물을 닦아내고 벽의 검은 때와 곰팡이를 벗겨냈지요. 땅 위로 통하는 환기구를 발견해 낸 것도 터널 청소 작업 덕분이었어요. 그곳에 가득 쌓인 쓰레기를 치우자 은은한 달빛과 서늘한 밤바람이 밀려들었어요.

지하 정원

아저씨는 환기구 안쪽에 작은 나무를 심었어요. 쓰레기장에 버려진 게 안쓰러워 가져다 화분에 심어두었던 나무였지요. 모스 아저씨의 지하 정원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누군가 아무렇게나 버렸던 나무, 더럽혀진 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공간, 아저씨의 정성 어린 손길에 새로운 공간, 새 생명이 자라는 장소가 된 것이에요.

터널 안에서 풋풋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어요. 물론 아저씨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분에 작은 나무도 쑥쑥 자라났어요.

지하 정원

환기구 덮개 위로 가지를 내민 나무, 한때는 온 도시가 떠들썩해질 만큼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물론 사람들의 관심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요. 오랜 시간 아저씨의 정성 어린 보살핌 속에 나무는 자라고 또 자라났어요. 어느 봄날 누군가 환기구 밖으로 자라난 나무 근처에 새로운 나무를 심었어요. 그곳에 풀씨가 날아와 꽃을 피우기도 했어요.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어요.

나무들은 쑥쑥 자라,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고운 빛으로 도시를 물들였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사람들이 머물다 갈 수 있는
작은 쉼터가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도 모스 아저씨는 승강장 청소를 마치고 지하 정원을 향해 걸어갑니다. 나무가 자라난 만큼 세월이 흘렀어요. 흐르는 세월 속에 모스 아저씨의 모습도 조금 변했어요. 초록 향기 가득한 정원에 쌓인 묵직한 세월의 깊이만큼 아저씨의 얼굴에도 삶의 깊이가 쌓였습니다. 물론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저씨의 표정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어요. 어두운 터널 안에서 환기구를 발견해 낸 것도, 그곳에 작은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세상을 향한 사랑, 나를 향한 사랑, 사랑은 세상을 바꾸는 커다란 힘입니다.

세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 숨결을 불어넣는 이, 그 온기로 세상은 오늘도 무사히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오늘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긴 건 어쩌면 언젠가 내가 했던 작은 행동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온 것일지도 몰라요.

참고로 “지하 정원”은 조선경 작가의 유학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1990년 뉴욕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시절, 나는 맨해튼과 호보켄 사이 홀랜드 지하철 터널을 청소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모스를 만났다.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책장 가득 꽃혀있는 다양한 책들, 미술 교육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가 그린 800여 점의 그림들, 틈나는 대로 작곡에 몰두한다는 그의 피아노를 볼 수 있었다. 늦은 밤 고된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도, 일 외에 또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어 가는 청소부 모스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현실의 모스가 어두운 터널 속에서 달빛이 새어 드는 널찍한 환기구를 발견했다면, 틀림없이 그곳에 나무를 심었을 거라 생각해 본다.

     – 조선경 작가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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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그림책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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