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는 날

잊어버리는 날

(원제: Glömdagen)
글/그림 사라 룬드베리 | 옮김 이유진 | 어린이작가정신
(2022/09/13)


그런 날 있죠. 뭘 해도 잘 안되는 날. 의지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무언가 자꾸만 어긋나 버려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고 있는 듯한 그런 날. 그런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뭐가 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던 거죠. 우주의 모든 기운이 나를 막아섰던 날.

엄마가 노아를 깨웠어요. 노아 친구 알마의 생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면서 엄마가 서둘렀어요. 선물을 사서 생일 파티가 열리는 두 시까지 알마네 집에 가야 했으니까요.

잊어버리는 날

그런데 노아의 반응은 영 시큰둥해요. 알마와 같이 논 적도 없고 친하지 않거든요. 시내에서 알마 선물을 고를 때에도 노아는 별 관심이 없어요. 어느 가게는 너무 덥고 또 어느 가게에서는 노아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너무 많아 알마 생일 선물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노아는 엄마에게 이끌려 이곳저곳 선물 가게들을 들락날락합니다. 그 와중에 노아가 가게에 재킷을 두고 오거나 모자를 잊어버리고, 그걸 찾으러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고… 시계 바늘은 두 사람을 재촉하는데 이것저것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노아 덕분에 가는 길은 더뎌지기만 합니다.

한 장면 한 장면 바라보다 보면 내 마음까지 초조해집니다. 아, 노아야 재킷! 재킷 챙겨야지! 모자를 벗어놨잖아! 소리치고 싶어져요. 노아 엄마 마음에 그대로 동화되어 버립니다.

잊어버리는 날

버스에 탔다 모자를 찾으러 가기 위해 내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힘들게 찾아간 알마네 집. 일반적으로는 여기서 이제 예쁘게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겠지요. 알마네서 신나게 생일 파티를 즐겼다는 이야기로. 노아가 준비한 생일 선물을 알마가 아주 흡족해했다고. 그날 둘은 재미있게 놀고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말이에요.

이 장면을 잠깐 살펴보세요. 느낌이 어떤가요? 노아의 엄마, 어딘가 잔뜩 움츠러든 것 같지 않나요? 문을 두드리려던 바로 그 순간 둘은 알게 되었어요. 또 일이 생겼다는걸.

힘들게 고른 알마의 생일 선물을 노아가 버스에 놓고 내린 거예요. 보는 나는 아아아아아악!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노아의 엄마는 꾹 참고 노아에게 말했어요.

“잊어버리자. 이제 생일 파티에 가는 거야!”

문이 열리고 알마가 나왔어요. 생일 축하한다고 환한 얼굴로 엄마가 말을 건넸지요. 그런데!!! 오늘 알마 생일이 아니래요. 다음 주래요. 어색함 속에서 차를 마시는 네 사람(노아와 엄마, 알마와 알마 아빠), 그 장면을 보고 있자면 흐흐흐 웃음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질 않아요. 나 자신이 노아 엄마가 된 것 같아 안절부절 불편한 마음이 되어버리지요.

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아와 엄마의 긴 그림자가 피곤한 하루였음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길고 고단한 하루를 보낸 엄마와 노아가 소파 위에 앉았어요. 긴장이 풀어진 모습으로 두 사람은 오늘 하루를 돌아봅니다. 하루 종일 깜빡한 날, 모든 걸 잊어버리자고 말하는 엄마에게 노아가 말했어요.

“내일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 없어요?”
“없을 것 같아. 중요한 건 없어.”
그럼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네?”

마지막 장면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나도 따라 결심을 합니다.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머리를 텅텅 비워놔야지!

노아가 잃어버린 알마의 생일 선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알마에게는 그 선물이 이미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는 돌아가는 길에 씁쓸한 목소리로 ‘선물을 잃어버려서 잘 됐네’하고 말했는데요.  사라 룬드베리는 긴장으로 가득했던 하루를 끝내면서 그림책 속에 잃어버린 물건의 행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났지만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는 알마의 생일 선물. 수많은 이들의 손을 거친 선물이 누군가에게 편안함을 더해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위로를 전해주고 있으니 끝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사라 룬드베리 그림은 언제 보아도 좋습니다.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요. 그림책을 품 안에 가만히 안아봅니다. 따뜻함이 내게로 전해집니다.

그런 날도 있지, 괜찮아! 하고 다독여주는 그림책 “잊어버리는 날”, 살면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도 있지요. 그만 잊고 털어내야 할 일도 있구요. 힘들고 피곤했던 날, 크고 작은 실수나 안 좋은 기억은 잠시 내려놓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보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 하고 그림책이 전하는 위로를 그대로 느껴보세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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