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원제: Esther Andersen)
그림 이렌 보나시나 | 글 티모테 드 퐁벨 | 옮김 최혜진 |길벗어린이
(2023/03/15)


제법 두툼한 그림책을 이리저리 매만지다 뒤로 돌려본 그곳에 쓰여있는 몇 줄 문장에 한참 동안 눈길이 머물렀어요. 달리고 달려서 세상 끝까지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오래전 어느 여름날의 기억, 풍경, 사람들이 지금 여기 이곳으로 소환됩니다.

방학은 달팽이 집 같았다. 가운데에는 집이 있었다.
나는 나선형 원을 그리면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까지 가 보려고 애썼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소년은 삼촌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여름 방학을 보냅니다. 기차역에 내린 소년을 다정하게 맞이한 이는 ‘지난 여름 방학 이후 쭉 소년을 기다려 왔던 게 틀림없는’ 소년의 삼촌이었어요. 노랗게 익어가는 옥수수밭 한가운데 그림처럼 존재하는 삼촌의 집. 다른 차원의 세상에 존재하는 신비의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버려진 온갖 물건들이 다정한 삼촌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그곳에서 비로소 소년의 여름이 시작됩니다. 안장에서 일어나 페달을 밟아야만 했던 삼촌의 자전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소년에게 딱 맞춤이 되었습니다. 모든 게 시간이 부린 마법이겠지요.

소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빨간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시골길을 달렸어요. 매일 조금씩 더 멀리까지.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그렇게 매일매일 좀 더 멀리멀리 나아가던 어느 날 소년은 이제껏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장소에 가닿게 됩니다.

생명의 원천이자 내면의 두려움, 아름다움과 비밀스러움,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는 바다. 드넓은 여백 위에 아득하게 묘사한 풍경은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입니다. 세계에는 경계가 없고 그 경계 없는 세상 밖으로 힘닿는 데까지 세계 너머 또 그 너머의 세계를 꿈꾸고 상상하던 오래전 내가 어느덧 소년이 되어 그곳에 서있습니다.

소년은 힘껏 달려가 그대로 바다의 품에 안겼어요. 그렇게 소년이 바다의 황홀함에 빠져있는데…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그러느라 가장 큰 파도를 보지 못했다.
깜짝 선물처럼 해변에 도착한 파도를.

깜짝 선물처럼 해변에 도착한 파도는 소년처럼 우연히 바다에 오게 된 에스더 앤더슨이라는 소녀. 스치듯 찰나의 순간이었어요. 소년이 에스더 앤더슨을 본 건. 곧이어 중년의 여성이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나타났고 그렇게 에스더 앤더슨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파도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짧은 순간은 소년을 이름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삼촌과 함께 하는 따뜻한 저녁 식사, 일과를 마치고 포근한 침대 위에서 맛보는 책 읽는 즐거움… 일상의 모든 일들이 더 이상 의미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 중년 여성이 부르던 ‘에스더 앤더슨’이라는 이름만이 소년의 입가에 맴돌 뿐.

소년은 다음 날 결심합니다. 다시 길을 잃어보기로… 어떻게 해야 길을 잃을지 소년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잃어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찾아 길을 나서는 소년. 소년은 에스더 앤더슨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해 여름 그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 파도처럼 밀려든 에스더 앤더슨이…

새로운 여정을 향해 나아가는 기차, 옥수수밭 한가운데 그림처럼 박혀있는 삼촌의 집, 길을 잃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바다, 소녀,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 차원이 다른 세계로의 점차적인 진입은 뭉클하면서 따뜻하고 아련합니다. 일련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가며 우리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가 되었겠지요.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살며 내일의 나로 성장할 테고요.

돌아오는 길은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사람들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이 세상 어딘가에 에스더 앤더슨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황순원의 『소나기』의 아련한 감성을 닮은 이야기 속에 장자크 상페의 그림을 떠올리는 이렌 보나시나의 그림이 매력적인 이 그림책은 80여 페이지의 제법 두툼한 그림책입니다.

하얀 여백으로 채워진 공간은 아찔하고 아득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며 그 상상을 무한대로 넓혀줍니다. 그림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에 남는 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철썩이며 파도치는 바다, 그리고 그해 여름을 가득 채웠던 나만의 에스더 앤더슨입니다. 여러분에게 그해 여름의 에스더 앤더슨은 누구, 또 무엇인가요?

정오의 뜨거운 여름 햇살마저도 두렵지 않았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품고 있는 그림책 『그해 여름, 에스더 앤더슨』. 돌아보면 좋은 기억들뿐입니다. 아프고 쓰라린 기억도 터질 듯 행복했던 기억도 모두 한순간, 가만히 돌아보면 울고 웃었던 수많은 기억들이 나를 조용히 미소 짓게 합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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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lee
unlee
2023/09/08 12:08

중년의 여성이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나타났고 그렇게 에스더 앤더슨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파도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글귀가 왜이리 뭉클할까요? 스치듯 찰나의 지나는 순간들에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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