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세 알 팥 세 알

봄이 오자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는 씨앗을 뿌렸어요.
콩 세 알 팥 세 알, 옥수수도 기장도 모두 세 알씩.

할아버지가 새들에게 말했어요.
“한 구멍에 세 알씩 묻었으니 한 알씩만 먹으렴.
한 알은 두더지 몫이고, 한 알은 우리 몫이야.”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해. 나도 참았거든.”
작은 아이가 말했어요.
새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산속 오두막엔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가 살아요. 사람은 둘뿐이지만 딸린 식구가 제법 많습니다. 제비, 참새, 까치, 멧비둘기, 꿩, 종다리… 이웃 마을들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이사 온 새들이 많았거든요. 산자락에 있는 작고 초라한 오두막이지만 부족하나마 새들에게 먹이를 나눠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허기를 이기지 못한 어린 새들이 땅 속에 심어 놓은 씨앗들까지 죄다 파먹어 버린 탓에 가을걷이는 초라하기만 합니다. 콩, 팥, 옥수수, 기장… 곡식들은 모두 내년에 씨앗 심을 양밖에 거두지 못했죠. 덕분에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는 겨우내 고구마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새들은 풀씨로 가까스로 추운 겨울을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할아버지는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콩 세 알 팥 세 알, 옥수수도 기장도 모두 세 알씩. 그리고 새들에게 말합니다. “한 알은 우리 몫, 한 알은 두더지 몫, 나머지 한 알은 너희 새들 몫, 그러니 꼭 한 알씩만 먹으렴.”이라고 말이죠. 배가 고파도 꼭 참으라며 할아버지를 거드는 작은 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새들.

약속대로 모두가 서로를 위해 조금씩 참으며 보낸 덕분에 이번 가을엔 배곯지 않고 겨울을 보낼만큼 충분히 거두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는 밭에 낟알들을 듬뿍 남겨두었고 새들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마치 잔칫날처럼요. 자랑하듯 불룩한 배를 앞으로 쑥 내민 새들을 보며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가 소리 없이 웃습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

세한도를 떠올리게 하는 소나무 아래 초가집 풍경을 배경으로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 그리고 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추사가 세한도의 모티브를 얻은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는 논어의 한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제자 이상적에게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그려 선물한 그림 세한도. 오랜 세월의 유배로 모두에게 잊혀진 자신을 잊지 않은 유일한 제자(역관인 이상적이 청나라 다녀올 때마다 구해서 스승에게 보내준 책이 120여 권이나 된다고 합니다)를 향한 고마운 마음과 늘 평안하기를 바라며 전하는 삶에 대한 조언을 담은 그림입니다.

세한도는 제자이자 인생의 벗을 향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거나 소유했던 이들이 감상평을 싯구로 적어 덧붙인, 요즘으로 치면 댓글들로도 유명합니다. 덕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세한도의 길이는 무려 14미터가 넘습니다(국립중앙박물관 소개글 보기).

자칫 자신에게 화가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살뜰히 챙긴 제자의 마음, 그런 제자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하는 스승의 마음, 그런 애틋한 우정에 감동받은 이들이 참지 못하고 덧붙인 감상들… 산속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작은 아이, 그리고 새들의 함께 행복한 삶과 닿아 있습니다. 배불리 먹은 새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할아버지와 방긋 웃는 작은 아이의 미소를 내 마음에 담습니다.


콩 세 알 팥 세 알

콩 세 알 팥 세 알

윤구병 | 그림 정지윤 | 개똥이
(2022/09/05)

시골 마을의 가을 풍경을 담아낸 “바빠요 바빠” 기억하시나요? 22년 전에 출간된 윤구병 작가의 그림책인데요. 우리나라 어린이 책 분야에서 오랜 세월 씨앗과 밑거름 역할을 해온 그가 오랜만에 새 그림책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한 “콩 세 알 팥 세 알”입니다. 그가 살아온 삶 그대로 가난 속에서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마음,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담은 그림책입니다.

작은 아이가 새들을 꾸짖던 말이 가슴에 박힙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 할 것까지 먹어 버리면 안 돼.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해.”

지난 5월의 잘못된 선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결과의 대가를 지금 톡톡히 겪고 있는 우리. 땅에 심어둔 씨앗까지 파먹어 치운 새들과 우리와 닮았다고 하면 좀 억지스러울까요? 바람이 있다면 알면서도 저지르는 이런 뻔한 실수를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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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희
임진희
2022/10/12 14:58

그림책은 언제나 읽어도 마음 따뜻해 집니다 ^^ 교훈도 되고 치유도 되고… 점점 그림책이 좋아집니다~

이 선주
Editor
2022/10/18 20:03
답글 to  임진희

교훈도 되고 치유도 되고…
또 짧은 순간 깨달음까지 주는
그림책이 가진 커다란 매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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