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랄 때 식구가 너무 많아서 엄마 아빠랑 형제들끼리만 사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엄마 아버지, 누나 셋, 우리 식구만도 대가족인데 작은 아버지네 식구들까지, 거기에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뭔가 부탁하러 끊임없이 찾아오던 사촌 육촌 팔촌(아버지와의 촌수였으니 저와는 육촌 팔촌 십촌이었겠군요, 사실 육촌부터는 친척이라고 하기도 뭐하죠 요즘은…) 등의 객식구들까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걸 다 견딘 우리 엄마는 어쩌면 외계인이었을지도… 😱👽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서 집주인으로서 군식구들에게 짜증을 낸 적도 많았는데, 돌아보면 윗대의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제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게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자식을 하나밖에 낳지 않았습니다. 둘 또는 셋 낳고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지인들 보면 아내와 눈 마주치며 고개 끄덕이곤 합니다. ‘그래~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애를 하나만 낳은 것만큼은 참 잘한 거야!’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죠. 또 하나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린다는 점?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생각으로 저는 늘 그런데 상대방들도 제가 느끼듯 편안하고 즐거웠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

무엇보다도 그 시절 염치 없던 그 군상들을 타산지석 삼아 적어도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는 삶은 살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린 마음에도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을까?’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치처럼 살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 와중에 내가 잘 따랐던 분들에게서 배운 좋은 점은 은연중에 체화되어 살아오는 동안 중심을 잘 잡게 해주었으니까요.

서론이 좀 길었죠? 앞으로 지역 갈등이나 정치적 분열보다 더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바로 세대간의 갈등 아닐까 싶습니다. 세대 구분 없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시대의 ‘어른’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법과 행정이 바로 서지 않아서이기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노인은 많아지고 젊은이들의 삶은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퍽퍽한 현실 속에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최적의 해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화두를 던져주는 “봉숭아 할매”“순례 씨”, 저는 이 두 권의 그림책을 보며 끼인 세대인 우리 4050들의 책임이 무겁다는 걸 느낍니다. 어린 시절 이웃끼리 주고받았던 마음의 자욱이 그나마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우리 세대가 그런 것이 영 낯설기만 한 젊은이들과 늘어만 가는 혈기왕성한(?) 노인들을 이어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인심 넉넉한 우리 동네 할머니 봉숭아 할매, 언제나 손자들 등 두들겨주며 응원해주시는 우리 할머니 순례 씨,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넉넉하고 푸근하게 해 줄 두 할머니 이야기 함께 보시죠~


봉숭아 할매

봉숭아 할매

글/그림 장준영 | 어린이작가정신
(2022/11/03)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옥탑방. 바로 봉숭아 할매의 집입니다. 그리고 옥상 가득한 화분들. 상추, 호박, 파, 토마토, 가지, 고추, 수박, 당근, 깻잎, 고수, 땅콩, 맨드라미, 봉숭아… 다양한 식물들만큼이나 화분 모양도 제 각각입니다. 다양한 모양의 상자들, 주전자나 고무 대야 같은 못 쓰게 된 살림살이들 가득 봉숭아 할매가 심은 생명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봉숭아 할매가 동네 꼬마들에게, 화분들에게, 하늘과 자연에게 다정스레 말 한 마디 한 마디 건넬 때마다 계절이 바뀌고 화분 속 채소들이 무르익고 고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오늘은 꽃씨를 뿌려야겠구먼, 고맙게도 비가 오시는구먼, 날씨가 엄청시리 덥네, 봉숭아물 들이는 게 그래 좋아?, 간 보다 김치 한 포기 다 묵겄네, 저런 발 시렵구로… 손수 심은 화분들뿐만 아니라 할매의 옥상을 놀이터처럼 드나드는 동네 꼬마들, 길냥이들, 이웃들에게 퍼주고 또 퍼주어도 언제나 모자람이 없는 봉숭아 할매의 넉넉한 인심.

오봉댁, 감나무집, 윤희네, 가겟집, 대추나무집,
골고루 잘 나눠졌남?

정성들여 키운 호박이며 상추, 고추랑 호박이랑 깻잎 등 먹거리들을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나눠 담으며 빠진 이웃 없나 살피는 봉숭아 할매의 다정한 혼잣말, ‘골고루 잘 나눠졌남?’ 

옆집과 다닥다닥 붙어 살다보니 이웃과의 충분한 거리가 절실한 도시에서는 오히려 이런 다정한 이웃이 부담스러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두 해 살다 이사하는 일이 잦다 보니 흉흉한 세상 인심에 누군가에게 선뜻 다가가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구요. 그래도 봉숭아 할매네 옆집으로 이사가게 된다면 제육볶음 맛있게 볶아 할매네 한 접시 나눠 드리고 상추랑 깻잎 한 소쿠리 얻어오고 싶네요. 그럼 또 봉숭아 할매의 구수한 목소리가 제 발걸음을 잡을 겁니다. ‘땡초 좋아혀? 그라믄 저짝에 고추도 몇 개 따다 묵어~’

‘핵가족화’ 시대와 ‘고령화’ 시대는 가족 개념의 확장을 요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불신의 사회에서 이웃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이웃들끼리 다정한 인심 주고받던 지난 날이 그리워지는 그림책 “봉숭아 할매”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 거리를 안겨줍니다.


순례 씨

순례 씨

글/그림 채소 | 고래뱃속
(2022/10/24)

아내의 큰이모님은 시골에서 혼자 사십니다. 올해 연세가 아흔셋. 다리가 좀 불편하시고 허리가 안 좋으신 것 말고는 아주 정정하십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뵙는데 하도 정신이 맑고 총기 넘치셔서 뵐 때마다 놀랍니다. 운전할 때 뒷자리에서 내비게이션에 안 나오는 식당 가는 길 안내도 척척 잘 해주실 정도로 똘똘(?)하시니까요. 시집온 이후 그 자리에서 지금껏 평생을 사셨다는 말에 놀랍고 신기해했었는데… 그림책 “순례 씨” 보자마자 그 이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순례 씨”는 한 평생을 살아낸 자가 오늘을 살아내느라 버둥거리는 우리들에게 건네는 응원과 격려를 담은 그림책입니다. 순례 씨가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여, 이렇게 혀 저렇게 혀 하며 구수하고 소박한 말씨로 툭툭 내뱉는 말들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습니다. 종일 고생하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가 끓여준 띄운 비지찌개 정신없이 퍼먹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앉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늘어놓는 엄마나 할머니 같은 그림책입니다.

살아서 좋다던 것들도 가고 나면 다 먼지.
오늘 밤에 가도 아쉬울 거 하나 없다.
눈을 뜨면 해도 뜨고 한술 가득 떠야 혀.
검게 물들이고 찍어 발라야 볼만혀.
걸어야 혀. 숨길이 트이니께.
달달한 게 효녀고 가수들이 효자여.
노니 뭐해. 일이 재미여.
오늘 딸 고추가 최고 쓸모니께.

‘눈을 뜨면 해도 뜨고 한술 가득 떠야 혀’ 라는 말, 우리 엄마들이나 우리 할머니들이 정말 많이 해주시던 말 아닌가요? 작가가 ‘뜨면’, ‘뜨고’, ‘떠야’ 로 라임까지 기가 막히게 맞춰주는 바람에 더욱 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해 뜨면 눈 뜨고 일어나 밥 한 술 가득 떠 먹고 또 하루 든든하게 살아가는 것, 노니 뭐하나요, 일 재미 삼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뭐~

‘제 오랜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 순향 할머니와 상례 할머니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작가의 헌사를 봐서는 ‘순례’라는 이름은 아마도 채소 작가의 친할머니 외할머니의 함자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이 그림책 만들기 위해 취재한 할머니 두 분의 성함일 수도 있겠구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세상 모든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따뜻한 격려를 담은 그림책 “순례 씨”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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