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원제: Il Paese Degli Elenchi)
크리스티나 벨레모 | 그림 안드레아 안티노리 | 옮김 김지우 | 단추
(2021/07/24)


여러분은 있어도 없는 사람을 만난 적 있나요?

그림책 뒤표지에 쓰인 글 한 줄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돕니다. 있어도 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지금 여기 있어도 없는 사람일까, 없어도 있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들.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로카페르페타라는 마을에는 시쿠리니 씨가 살고 있었어요. 시청 등기소 소장이자 유일한 직원인 시쿠리니 씨는 매일 등록부에 사람들의 이름을 올리고 등록증을 발급해 주는 일을 했어요. 로카페르페타 마을 주민이 되려면 등기소에 등록을 해야 했지요. 등기부에 이름이 없으면, 있어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등록을 하기 위해 등기소에 찾아온 이들에게 별의별 질문을 다 하고 서류를 작성하게 하고 찬찬히 요리조리 살펴본 후 서류에 도장을 찍고 서명을 한 후 자신의 서명이 담긴 종잇조각을 내미는 것이 시쿠리니 씨의 업무였어요. 에벨리나 아주머니는 시쿠리니 씨로부터 ‘바닥 청소부 등록증’을 받았고 마리오는 ‘오븐에 감자 굽는 사람’으로 등록되었어요. 루치아는 ‘고슴도치 지킴이’, 굴리 엘모는 ‘구멍 난 양말 수선공’으로 등록되었답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시쿠리니 씨 마음대로였지요. 불만을 품은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구요.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시청 등기소로 몰려오면서 시쿠리니 씨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직 등기부에 이름이 올려져 있지 않은(그래서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열두 명의 아이들은 시쿠리니 씨에게 마구잡이로 자신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어요.

병뚜껑을 수집한다고 외치는 마태오, 사촌이 열두 명이나 있다는 아델레, 반에서 키가 제일 크다는 안드레아… 그날 시쿠리니 씨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아이들을 등기부에 등록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어요. 집에 가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어요.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의 단정했던 일상은 아이들로 인해 무너지게 됩니다. 다음 날 또 찾아온 아이들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점을 다시 소개했거든요. 아이들에게 (맞춤형) 등록증을 새로 만들어 주고… 그리고 다음 날에도 또다시 등기소를 찾아온 아이들로 사무실은 시끌시끌 북적북적.

아이들은 알록달록 색종이를 손에 한가득 들고 있었어요.
자기가 누구고, 무엇을 잘하는지 온종일 써서 가져온 거예요.
솔직히 등록증이 뭐 별건가요?
마음만 먹으면 그림을 그려서 예쁘게 꾸밀 수도 있어요.

“제가 모아온 등록증에 서명해 주세요!”

그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온 시쿠리니 씨는 집 벽에 걸린  자신의 등록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등기 대학 등기과 등기 박사 페르모 시쿠리니’, 이 짧은 한 줄 문장로 시쿠리니란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등록되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사람, 타인이 등록해 준 그대로만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그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 직접 만든 등록증을 들고 온 아이들 덕분에 시쿠리니 씨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로카페르페타 마을의 시쿠리니 씨와 아이들의 남은 이야기는 직접 그림책으로 감상해 보세요. 여러분에게도 흐뭇한 미소를 안겨 줄 거예요.

글을 쓴 크리스티나 벨레모는 철학 그림책인 “꽉찬이 텅빈이”를 쓴 작가구요. 안드레야 안티노리는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지식 정보 그림책인 “고래 책”의 저자입니다.

힘차게 자기 선언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림책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여러분은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나요? 양말을 신을 땐 어느 쪽부터? 아침에 이를 먼저 닦나요, 샤워를 먼저 하나요? 눈동자는 무슨 색인가요? 오른손잡이인가요, 왼손잡이인가요?

살아오는 동안 이런 궁금증 가져본 적 있나요? 나의 모든 걸 찬찬히 바라보고 깊이 생각해 보세요.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조각으로 이루어졌는지. 이제껏 그냥 이렇게 살아왔는걸,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이렇게 권태롭게 대답하기에 햇살은 너무나 아름답고 여기 지금 이곳에서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그 누구의 무엇도 아닌 나라는 고유한 존재, 대체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 ‘나’입니다. 오늘은 색종이 100여 장을 오려 놓고 나 등록증 만들기 놀이를 해봐야겠습니다. 로카페르페타 마을의 어린이들이 했던 것처럼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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