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

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

(원제: Smoot: A Rebellious Shadow)
그림 시드니 스미스 | 글 미셸 쿠에바스 | 옮김 김지은 | 책읽는곰
(2023/12/15)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림자 스무트는 지난 7년 반 동안 하품 나는 장면만 읽으면서 지냈습니다.”

7년 반이란 시간 동안 늘 똑같은 일만을 되풀이하며 살았던 그림자 스무트. 스무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아이 때문이었어요. 그림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아이가 무표정이니 아이 그림자인 스무트도 무표정일 수밖에 없었어요. 둘은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며 언제나 정해 둔 선 안에만 머무는, 하품 나는 장면만을 되풀이하는 날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림자는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입니다. 안데르센 동화 중에도 『그림자』(고정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길벗어린이 / 2021)란 제목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담긴 열등한 성격을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융은 선택되지 못한 인격, 선택되지 못한 꿈 등 선택되지 못한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 그림자를 이룬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림자와 자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입니다. 빛이 있는 곳엔 반드시 어둠이 존재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예요. 자아도 그림자도 모두 ‘나’입니다.

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

스무트와 아이가 머무르는 공간과 다른 이들이 머무는 공간에 확연한 차이가 보입니다. 떠들썩하고 활기차 보이는 저쪽 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이쪽 세상. 아이가 있는 곳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자신을 꼭 닮은 그림자뿐입니다.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는 둘은 마치 딴 세상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사각의 검은색 프레임이 그 느낌을 더해주고 있어요.

아이에게 얽매여 지루하게 살아야 했던 그림자 스무트는 오직 꿈을 꿀 때만은 자유로울 수 있었어요. 꿈속에서 자유로워진 스무트는 햇빛처럼 밝은 노랑 옷을 입고는 카나리아의 노랑 같은 노래를 불렀고, 들꽃의 빨강 속에서 춤도 추었습니다. 아이의 무의식은 이렇게 꿈을 통해 진정한 소망을 비춥니다. 지루함을 떨치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 마음껏 자기를 펼칠 수 있기를…

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스무트가 아이에게서 떨어져 나왔어요. 꿈이 현실이 된 것이죠. 검은 프레임 밖으로 나온 팔 한쪽이 드디어 스무트가 현실이란 단단한 벽을 깨고 자유를 얻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꿈에 그리던 여행을 시작하면서 스무트는 자유를 만끽합니다. 스무트의 자유로운 상태를 세 장면에 걸쳐 글 없이 생동감 넘치는 그림만으로 표현했어요.

그림자인 스무트가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꿈꾸던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본 다른 그림자들도 용기를 냈어요. 민들레의 그림자가 훌쩍 날아올랐고, 왕자를 꿈꾸던 개구리의 그림자는 꿈에 그리던 망토를 두른 왕자가 되어 떠났어요. 잠자리의 그림자는 크고 무시무시한 용이 되어 훌쩍 떠났지요.

자유를 얻은 그림자들이 활보를 하게 되면서 도시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스무트는 그림자의 주인이 자유를 찾고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것으로 모든 그림자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본래 자신의 주인이었던 아이와 다시 하나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세상 밖으로의 경험이 스무트에게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준 모양입니다.

그림자를 다시 만난 아이 얼굴에 생기가 생겨났어요. 아이도 웃고 스무트도 웃고, 한껏 웃고 뛰고 제멋대로 굴고 규칙과 의무에서 벗어난 둘의 모습은 시원한 해방감을 안겨줍니다.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림자 스무트의 책은 이제…
노래하고 종을 울리고 훨훨 날고 힘차게 춤추는 온갖 색으로 가득하답니다.

시작과 마무리에 사용된 수미상관 기법의 문장은 깊은 여운을 안깁니다. 첫 문장이 정해진 선 안에 머물렀던 둘처럼 정갈하게 쓰였다면 마무리되는 시점에 쓰인 문장은 아이와 그림자처럼 생동감 넘치게 지그재그로 쓰여있어요. 아이와 그림자는 힘차게 달려갑니다. 저 편에 한 친구가 이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

속표지에 나오는 아이와 스무트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시무룩하게 앉아있지만 그림자는 나비와 춤추고 있어요. 홀로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이의 속마음은 사실 이랬던 것이겠지요. 그림자 스무트는 아이의 실현되지 못하고 억압된 꿈과 욕망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아이와 그림자가 일치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힘차게 달려가면서 손 흔드는 아이는 미소를 짓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표정이 보이지 않는 스무트도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꾹꾹 눌린 억압에서 벗어나 아이를 일깨우는 그림자 스무트. 아이에게는 이름이 없지만 그림자에게는 이름이 주어졌어요. 이름이 없는 아이는 수많은 우리를 대표합니다. 그 아이는 가온이일 수도 있고 예은이일 수도 진희일 수도 있어요. 누구든 그 아이일 수 있습니다.

진짜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책 『어느 날, 그림자가 탈출했다』. 자신의 욕망을 읽지 못하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도 모두 삶의 위기입니다. 양파껍질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내면을 가끔은 찬찬히 들여다보며 삶의 방향과 현재의 상태를 성찰해 보아야겠습니다. 내 그림자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를…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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