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원제: Jeppe Unterwegs)
글/그림 유타 바우어 | 옮김 김영진 | 미디어창비
(2022/08/22)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이라는 제목을 읽고 조금은 가벼운 내용의 책 일 거라 생각했어요. 햇살처럼 샛노란 표지도 그랬고 작고 귀여운 예페 모습도 그랬고… 심부름이란 게 어딘가 가볍고 부담 없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끝까지 읽고 난 후 가슴을 가득 채우는 그 묵직함에 ‘아! 유타 바우어~’하고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임금님의 부름을 받은 예페는 아주 중요한 편지를 이웃 나라에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언덕을 몇 개 넘고 구불구불한 강을 거슬러 쭉 올라가다 보면 숲길이 나오고 그 길로 계속 가면 이웃 나라 성에 도착한다는 임금님의 말.

심부름이라기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길, 얼마나 걸릴까, 안전할까, 임금님의 중요한 편지를 잘 전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 건 예페가 작고 여린 우리 아이들 모습 같아서였겠지요.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길을 떠나보면 예상치 못했던 일이 불쑥불쑥 나타나 계획이 틀어지곤 하지요. 예페의 심부름 길도 그렇습니다. 예페는 중요한 편지를 전하러 가는 길에 다친 아빠 다람쥐, 울고 있는 꼬마, 아이들을 돌보느라 지친 엄마 돼지, 나이 많은 염소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막막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돕느라 일정이 자꾸만 늦춰졌지만 예페는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해결하며 씩씩하게 이웃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임금님과 헤어진 후 하나였던 화면은 두 개로 분할됩니다. 넓게 배치한 위쪽은 컬러로 예페의 길을 보여주고 있고, 아래쪽은 모노톤으로 임금님의 일상을 그리고 있어요. 화면 위쪽에는 성 밖의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헤치고 나아가는 예페의 시간이 흐르고 아래쪽 화면에는 성 안에서 지내고 있는 임금님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둘의 인생이  한 화면 속에 나란히 흘러가고 있어요.

조그맣고 여린 아이 같았던 예페는 다람쥐 가족이나 울고 있는 꼬마를 도와줄 땐 다정한 형처럼 느껴집니다. 힘들고 지친 엄마 돼지를 대신해 아기 돼지를 돌보고 있을 땐 맘씨 좋은 삼촌 같고 염소 할아버지의 길동무가 되어줄 때는 듬직한 청년의 모습이지요.

사나운 개를 만나 끔찍하게 멀고 춥고 깜깜한 길을 돌아가던 예페는 그만 지쳐 쓰러지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예페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다정한 알마를 만나 몸을 회복한 예페, 알마와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임금님의 심부름을 마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어요. 그렇게 열심히 걸어 드디어 도착한 이웃 나라 성.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너무 익숙한 느낌의 이웃 나라. 알고 보니 예페가 길을 돌고 돌아 이웃 나라가 아닌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온 것이었어요.

임금님을 다시 만나는 순간 둘로 나누어졌던 화면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다시 경계가 사라집니다. 전하려 했던 편지는 불태워지고 임금님은 작은 집을 지어 예페와 함께 살기로 하지요. 그곳에 알마가 찾아오고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각자 삶은 여기 함께 모두의 삶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그 순간 저는 이제까지 오로지 심부름의 성공 여부에만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편지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임금님한테 벌을 받게 되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재미있는 건 끝까지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이제 이딴 건 필요 없다’며 아무렇지 않게 편지를 태워버리는 임금님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안타까워지는 건 왜일까요? 늘 임무 완수에만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일까요? 살다 보면 다양한 일을 겪게 됩니다.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게 아닌 것이 될 때도 있죠. 임금님의 편지는 그런 것을 뜻합니다.

오직 목표만 생각하며 달려가던 우리에게 과정의 아름다움과 그것으로 얻는 행복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친절하라, 사랑하라, 이해하라, 그리고 함께 하라. 찬찬히 나를 돌아봅니다. 바쁘게 서두르던 마음을 누르고 잠시 여유를 가져봅니다.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그림책 맨 뒷장 마스크 쓰고 바쁘게 심부름(?) 가는 유타 바우어의 모습도 잊지 말고 찾아보세요. 예페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요.  바쁘게 길을 가는 유타 바우어, 그 길에서 만난 우리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까요?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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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안영신
2022/10/21 16:35

좋은 책 소개 늘 힘이됩니다. 오늘처럼 기운이 필요한 날에는 더욱요 🙂
사진 속 분이 유타 바우어 맞죠? 왜 전 아무 근거 없이 남자라고 생각했을까요?ㅋ

가온빛지기
Admin
2022/10/21 17:25
답글 to  안영신

유타 바우어… 이름 또는 성 탓인지 여성 작가라는 걸 뒤늦게 알고 웃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가온빛지기들도 예외는 아니었구요. ^^

오늘 기운이 많이 필요한 안영신님께 가온빛지기들의 기 모으고 또 모아서 전해드립니다.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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