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처음 만난 프랑스 작가 파니 뒤카세의 그림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흔들린 사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흐릿하지만 오래 되지는 않은, 방금 전 일이지만 선명하지는 않은… 로모나 토이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순서나 기준 없이 흩트려놓은 듯한 느낌. 조금은 뜬금없고 개연성 없이 튀어나오는 그림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떼지 못한 채 붙들려 있다 보면 여기저기서 나의 기억, 나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묘한 매력의 그림책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 그리고 “곰들의 정원”.

그래서일까요? 소설이건 그림책이건 독자들은 대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지만 파니 뒤카세의 그림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스텔라, 몽타뉴, 쉐리코코, 할머니, 꼬마 마법사, 파피 할아버지와 페페 할아버지, 꼬마곰… 두 권의 그림책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서 누구의 어떤 이야기 어떤 모습에 여러분이 공감하게 될지는 그림책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참고로 한글판은 두 권 모두 올해 8월에 출간되었는데 어떤 그림책이 먼저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확인해봤습니다. 두 작품 모두 2015년에 출간됐고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은 2월, “곰들의 정원”은 10월에 출간되었습니다(한글판은 “곰들의 정원”이 20여 일 먼저 출간).

파니 뒤카세의 두 그림책은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그동안 북적거렸던 마음과 생각의 공간에 여백을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줍니다. 그 여백을 채워줄 음악이 필요한 분은 김사월의 ‘수잔’ 추천해 봅니다. ‘… 그저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넌 혼자 남는걸, 살아온 것도 낭비된 것도 아닌 텅 빈 삶이었지…’ 혼잣말하듯 읊조리는 가사도 노래도 그림책과 많이 닮았습니다. [김사월의 ‘수잔’ 노래 듣기]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

(원제: De la tarte au citron, du thé et des étoiles)
글/그림 파니 뒤카세 | 옮김 신유진 | 오후의소묘
(2022/08/30)

온종일 욕조에 몸을 담그고 황당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무스텔라, 언제나 그녀를 돌보고 지켜주는 반려견 몽타뉴, 누군가에게 선물할 레몬 타르트를 하루종일 굽는 쉐리코코, 125마리의 고양이들에게 온종일 차를 대접하는 백 살 넘은 할머니, 반짝이는 운석을 타고 우주를 건너온 꼬마 마법사.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안전지대를 넘어간 거야.
그녀가 종종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할머니 집 편백나무를 지나 저기 저 길모퉁이가
세상의 끝은 아니었어.

자신이 즐겨 읽는 황당한 이야기책 속에서 튀어나온 꼬마 마법사를 쫓아가느라 처음으로 안전지대를 넘어선 무스텔라. 언제나 자신과 안전지대 안쪽에서 지낸줄로만 알았는데 안전지대 너머 저편에서도 만나게 되는 이웃들 쉐리코코와 할머니.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여행에는 어떤 두려움과 망설임, 또 어떤 놀라움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나 스스로를 내 안에 가둬둔 것은 아닌지, 처음 가본 길 앞에서 발걸음 내딛길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 너머에 있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늘 갈망하면서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그림책 “레몬 타르트와 홍차와 별들”. 더 이상 주저하지 말라고, 그냥 친구들과 함께 또는 나 자신을 믿고 한 걸음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놀랍고 굉장한 일들이 신나게 펼쳐질 거라고 뒤에서 우리 등을 살짝 밀어주는 그림책입니다.


곰들의 정원

곰들의 정원

(원제: Le jardin des ours)
글/그림 파니 뒤카세 | 옮김 정원영, 박서영 | 오후의소묘
(2022/08/08)

4월의 수선화들 사이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중함으로 가득 채워주었던 파피 할아버지와 페페 할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는 꼬마곰. 파피 할아버지의 정원은 아늑하지만 태평양과 대초원을 가득 담을 만큼 풍성했고, 식탁은 바삭한 크러스트 요거트 케이크처럼 달달하고 민들레 약차처럼 향긋했습니다. 페페 할아버지는 낮잠과 신문과 카드 게임을 즐겼고, 산딸기와 수프를 좋아했고, 라일락 나무 아래에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죠.

이제는 볼 수 없지만
지금도 색색의 기억들이 마음 가득 차올라 머릿속을 춤추며 뛰어다녀.
어떤 날은 모든 게 너무 선명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색색의 추억들이 머릿속을 뛰어다니며 춤을 춰.
어떤 날에는 너무 많은 기억이 밀려와.
진딧물도 별꽃도 없는 나의 정원은 사라지지 않고 늘 거기에 있어.
그리고 이제는 알아.
그곳을 떠나는 일도 더는 두렵지 않다는 걸.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파피 할아버지와 페페 할아버지가 꼬마곰을 가득 채워주었던 색색의 추억들. 꼬마곰은 알고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 안에서 언제나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내일을 향해, 나의 삶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꼬마곰은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되겠죠. 파피 할아버지와 페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의 숲을 헤쳐나가며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다 문득 힘든 날이면 언제든 두 할아버지의 정원으로 돌아가 잠시 쉬어갈 수 있음을.

소중한 이와 함께 가꾼 삶의 정원 그 기억 속의 온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언제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어준다고 말하는 그림책 “곰들의 정원”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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