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대통령님

대통령이 출근을 합니다. 비서가 결재할 서류들과 요란하게 울려 대는 전화기를 들고 옵니다.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이미 서류가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쌓여 있습니다. 법률, 국가기밀, 중요사안, 대외비, 긴급사안, 급선무 등등의 온갖 서류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마는 대통령. 자신의 능력 밖의 일들임을 새삼 깨달은 듯 멍한 표정입니다.

울리는 전화기들에서는 주식시장 붕괴, 지하수층 오염, 경제 위기, 치솟는 실업률, 신종 독감, 총파업, 횡령 사건, 결식 아동 증가 등의 다급한 보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역시나 자신의 무능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의 대통령은 수화기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듣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장관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그 판을 기웃거리는 자들은 대통령에게 한 자리 내놓으라고 졸라대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리에만 욕심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전화기보다도 더 요란하고 더 다급하게 울부짖는 전화기 한 대.

여보세요? 대통령님?
‘바로-저-위’ 호수에서 괴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저-위’ 호수는 처리하기 곤란한 서류들, 특히 자신들이 마주하기 싫은 문제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그렇게 내팽개쳐 두었던 사안들이 결국엔 하나 둘 터져 버리고 만 겁니다. 처리할 능력이 없어서 모른 체 했던 문제들, 힘 있는 자들 편에 서서 듣지 못한 척 했던 시민들의 목소리들, 지금껏 처리하지 못했거나 일부러 미뤄 두었던 문제들이 결국엔 괴물의 모습으로 무능한 대통령, 부패한 정치인들 앞에 등장한 겁니다.

이런 자들이 하는 짓은 늘 한결같은 것을 보면 그들은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이크 앞에 서서 국민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말이나 대충 늘어놓으며 상황을 얼버무리는 대통령.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괴물은 잘 진압되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안정과 평화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관계부처에서 계속 논의 중이오니 안내에 따라 지침을 준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정부는 이 상황을 보다 신속하게 해결한 뒤 조만간 국민 여러분 앞에 다시 서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 드릴 수가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괴물은 잘 진압되었으니 다시 모든 것들을 정상화시킬 수 있도록 국민들은 안내와 지침을 잘 따르라는 거짓말을 남기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대통령. 대통령이 집으로 서둘러 간 이유는 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데요. 대통령이 서둘러 귀가해서 만난 사람은 과연 누구일지, 그리고 대통령과 그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될지는 그림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괴물이 출몰했다는 호수는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민정신입니다. 아주 곤란한 문제, 매우 민감한 문제, 혼란스러운 문제, 골치 아픈 문제들을 꼭꼭 숨겨두었던 바로 그 호수에서 괴물이 나타났으니까요. 괴물은 바로 정치인 자신들이 국민의 눈을 가린채 저질렀던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들입니다.

괴물은 바로 우리 시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썩어 있는 자신들보다 더 한결같이 민주와 정의를 좇는 우리 시민들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괴물과도 같을 테니까요. 늘 자신들의 발 아래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엔 자신들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바로 우리 시민들이니까요.


잠시만요 대통령님

잠시만요 대통령님

(원제 : Le Président du Monde)
그림 알베르틴 | 글 제르마노 쥘로 | 옮김 정혜경 | 문학동네
(2017/05/15)

『잠시만요 대통령님』은 죄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정치판에 식상해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기시감을 안겨줍니다. 어디서 많이 본 정치인, 평론가, 기자 등등이 그림책 속에 차고 넘쳐나니까요. 마음 같아선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기자 등등 정치판에서 먹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필독서로 한 권씩 나눠주고 매일 아침 깨어나서 한 번,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한 번 읽히고 싶은 그림책입니다(아쉽게도 절판되었습니다).

편견과 혐오, 그리고 이기심 등으로 시민을 분열시키며 정치인들은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서는 친절하게 웃음 짓지만 돌아서서는 야비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국민을 기망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촛불로 하나 되었던 그날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왜 광장에 모였었는지, 왜 모두 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어올렸었는지, 광장에 모였던 우리 모두 하나가 되었던 그 순간의 뜨거움을 기억하는 것… 그게 바로 시민정신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0 0 votes
Article Rating
알림
알림 설정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모든 댓글 보기
0
이 글 어땠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주세요!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