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달팽이

왼손잡이 달팽이

(원제 : The Snail With The Right Heart, A True Story)
마리아 포포바 | 그림 핑주 | 옮김 김선영 | 라임
(2021/11/25)


이야기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땅에 생명이 존재하기 이전, 하늘에 별들이 절반도 태어나기 전으로.

아주아주 오래전에…….
하늘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별들이 절반도 태어나기 전에,
높다란 산맥이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그때는 넓디넓은 바다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바다에서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 일어났어요.
생명이 아닌 것에서 생명이 태어났거든요.
모래알보다 조그맣고 쥐의 눈썹보다 가녀린 최초의 생명이 말이에요. 

왼손잡이 달팽이

넓디넓은 바다의 생명 아닌 것에서 시작된 생명. 그것은 돌연변이로 인한 시작이었어요. 그렇게 탄생한 생명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바다에서 뭍으로 나아가기! 달팽이도 그들 중 하나였어요. 미지의 세상에서 살 집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달팽이는 집을 짊어진 채 모험을 시작합니다. 달팽이는 그렇게 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현한 작가 핑주의 그림이 돋보입니다. 느리지만 차분하게 뭍으로 올라오는 작디작은 생명체, 그것이 오래전 나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 한 장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어요. 저 멀리 수평선 위로 이제 막 고개를 내민 태양처럼 생명들이 이 땅 위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렇게 또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왼손잡이 달팽이

껍데기 나선 무늬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보통의 달팽이들과 다른 특이한 달팽이가 산책하던 한 할아버지에게 발견됩니다. 다른 달팽이보다 크기가 좀 작고 등 껍데기 색이 조금 더 짙고 더듬이 하나가 동그랗게 말려 있는 달팽이, 거기에 껍데기 나선 무늬가 왼쪽으로 돌아가는 아주 특이한 달팽이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서 은퇴한 학자였어요. 마침 할아버지는 며칠 전 라디오에서 오랫동안 달팽이를 연구해 온 앵거스 데이비슨 교수의 인터뷰를 들었던 참이었지요.

앵거스 교수 연구실로 보내진 달팽이는 ‘제레미’란 이름을 얻게 되었어요. 이 특이한 달팽이의 시작을 표현한 글이 참 아름답습니다.

유전자는 부모님이 우리 몸이 될 텃밭에 심는 작은 씨앗이에요.
씨앗이 어떻게 피어나느냐에 따라서 우리 몸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고유한 우리’가 되지요. 그리고 유전자는 생명이 미래에게 말을 전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키가 얼마나 클지, 눈동자는 무슨 색일지, 손가락과 발가락은 어떤 모양일지 결정하거든요.
유전자라는 씨앗이 우리 몸에서 꽃을 피우면,
우리는 그때가 돼서야 꽃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예요.

물론 모든 씨앗이 꽃을 피우는 건 아니에요. 어떤 씨앗은 텃밭에서 잠을 자다 몇 세대를 거친 후에 꽃을 피우기도 하거든요. 이런 씨앗을 우리는 ‘열성 유전자’라고 부른답니다. 열성 유전자를 ‘잠들어있는 씨앗’이라 표현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열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이었는지 지금까지 ‘열성 유전자’는 ‘열등’하다고 생각해왔어요. 이 그림책을 통해 우성과 열성은 발현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일 뿐 열등과 우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레미의 시작도 그랬어요. 제레미의 조상 중 누군가가 물려준 희귀 열성 유전자가 비로소 제레미에게서 깨어난 거예요. 오랜 잠에서 깨어난 유전자가 제레미의 껍데기 방향을 반대로 돌린 것이지요.

껍데기 무늬뿐 아니라 몸속 내장 기관의 좌우 자리가 바뀌어 태어난 돌연변이 달팽이 제레미를 통해 좌우바뀜증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깊이 연구하고 싶었던 앵거스 교수는 라디오에 나가 제레미의 짝을 찾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제레미가 짝짓기를 해서 아기를 만들려면 자신처럼 좌우바뀜증 달팽이를 만나야 하거든요.

왼손잡이 달팽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제레미의 짝이 될 달팽이를 찾아내 앵거스 교수의 연구실로 보냈지만 끝내 제레미는 자신을 꼭 닮은 아기 달팽이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어요. 돌연변이를 만든 열성 유전자는 생명의 텃밭 속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요.

석양을 따라 느린 걸음을 걷는 달팽이, 떠나왔던 자리로 회귀하는 달팽이의 모습을 그린 장면에서 다시 뭉클해집니다. 처음 세상에 홀연히 왔던 것처럼 제레미는 지금 이 세계를 떠나고 없지만 제레미가 남긴 씨앗은 미래 어딘가에서 다시 그 꽃을 홀연히 피워낼 거예요. 아주 오랜 시간 이 땅의 생명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자웅동체인 달팽이는 혼자서도 알을 낳을 수 있어요. 이때 태어난 2세는 엄마(또는 아빠인) 달팽이와 거의 똑같은 아기가 태어납니다. 짝짓기를 통해 태어난 아기는 양쪽을 반반씩 닮아 태어나요. 변화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서 달팽이는 짝 짓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

왼손잡이 달팽이
“왼손잡이 달팽이” 앞 면지

그림책을 다 읽고 앞뒤 면지를 다시 살펴보니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잠든 씨앗이 언젠가 꽃피울 날을 기다리면서 꿈꾸는 듯한 모습, 그 자체로 설렘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주 속에서 깨어 있는 조그마한 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핑주 작가의 말이 그대로 와닿는 장면입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유전자의 결합과 변이,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싹틀 날 만을 기다려왔던 유전자의 묵묵한 기다림이 현재의 나를 완성해 낸 것이겠지요. 나의 유전자는 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 어떤 꽃을 피워낼까 생각하다 보니 우리 사는 이곳이 진정한 판타지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쓴 마리아 포포바는 1인 미디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아주 높은 작가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달팽이 제레미 이야기는 2020년 가디언지에도 실린 바 있습니다.

다름을 통해 다양성의 가치,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는 그림책 “왼손잡이 달팽이”, 다르다는 것이 배척해야 할 대상,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 신비하고 놀라운 것, 사랑스러운 것, 포용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달라도 좋아! 느려도 좋아! 오랫동안 우리 함께 하고 싶어! 여기 이 순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우린 그런 존재니까요.


진리의 발견

“왼손잡이 달팽이”를 쓴 마리아 포포바의 글이 너무 좋아 또 다른 책을 찾다 발견한 책이 “진리의 발견”(다른, 2020)입니다. 840여 쪽의 두툼한 벽돌책을 읽으러 서둘러 일어나는 아침은 요즘 저에게 또 다른 행복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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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이지영
2022/02/25 17:38

안녕하세요~잘 지내시죠? 아이랑 방학이라 집에서 복작복작 있다가 그림책을 샀어요 새로시작하는 시기라 그런지 가온빛보고 꽂혀서 새해아기, 은행나무열매, 시작해봐 나답게, 왼손잡이 달팽이, 진리의발견, 그리고 영어원서그림책도 몇권샀네요~항상 그림책에 욕심부리고 있어요~왼손잡이 달팽이 글이 너무아름다운 지식그림책이라 감탄하며 봤어요 인문학적인 지식그림책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그림책을 보면 꼭 사고싶어지는데 진짜 그림도 멋지고 감탄했습니다.
저는 라떼를 좋아하는뎇요즘 아침에 커피를 내려 우유를타고 아이랑 베이글을 먹으며 책을보는게 진짜 행복하더라구요 그행복에 항상 가온빛이 함께합니다. 항상 감사하고 건강하세요 아 그리고 그림책수업할때 책들을 읽고 생각하고 이야기나누어그런지 수업했던 책들이 정말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다른 책구성으로 또 수업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시간이 지나니 할머니의 팡도르가 진짜 가슴속에 오래오래 간직되듯이 남더라구요~^^

박선미
박선미
2022/02/25 23:21

다르다는 건 우리의 정서상 배척의 대상이고 방해의 상대라고 여겨졌던 저 어릴때의 교육과지금의 교육이 달라진 걸 느낍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것에 대한 불편함을 그렇지 않은 다수가 어필하고 차별하고 있으니 쉬운 그림책으로 어떤 질문을 던지며 찾아갈지 기대가득입니다. 이수지작가님과 같은 상을 놓고 있어서일까요, 더 관심이 가네요..
우리는 각자의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더불어 살고 있어요. 더불어 살고 있음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음을 나타내지 않음으로 너무 불편해 말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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