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나라에서

어스름 나라에서

(원제 : I Skymningslandet)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그림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 옮김 김라합 | 창비
(2022/01/24)

※ 1994년 초판 출간


양쪽 표지를 잡고 그림책을 활짝 펼쳐봅니다. 밤의 짙푸른 어둠에 삼켜지기 직전의 그 짧은 시간 붉게 물든 저녁 하늘 위를 가볍게 날고 있는 두 사람… 꿈결 같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마음이 텅 빈 듯 쓸쓸하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몽글몽글 그리움이 샘솟습니다. 누굴까, 무얼까, 무엇이 이리 그리운 것일까 생각하면서 한 장 한 장 찬찬히 그림책을 감상합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고 나면 이 한 문장이 온통 내 마음을 휘감습니다.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어스름 나라에서

다리가 아파 일 년째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예란, 어둡고 무거워 보이는 방안 풍경은 그런 예란의 갑갑한 마음처럼 보입니다. 백합 줄기 아저씨가 처음 예란을 찾아온 건 부엌에서 엄마와 아빠가 예란이 다시는 못 걷게 될 거라는 말을 나누고 있었던 그 날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어요.

삼 층 집 창문을 두드린 백합 줄기 아저씨는 예란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이 도시를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창문을 기웃거리지. 어스름 나라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말이야. 혹시 너, 가고 싶지 않니?”

어스름 나라에서

예란은 백합 줄기 아저씨를 따라 어스름 나라를 여행합니다. 어스름 나라에서는 다리가 아픈 것쯤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스톡홀름 상공을 날아 클라라 교회 첨탑에도 올라가 보고 크로노베리 공원 나무에 잔뜩 열린 사탕도 맘껏 먹었어요. 작고 이상한 어스름 나라 사람들이 탄 전차를 직접 운전해 보기도 했고 철길을 벗어나 물속을 달려 궁전에 사는 어스름 나라 왕과 왕비도 만났구요. 또 빨간 버스도 운전해 보았어요. 어스름 나라에 사는 크리스티나를 만나 즐겁게 춤도 추고 맛있는 것도 먹고 동물원에서 말하는 사슴, 레몬주스를 마시는 아기곰도 만났죠.

할 수 있을까, 괜찮을까 걱정하며 망설이는 예란에게 백합 줄기 아저씨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줍니다.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어스름 나라에서

불그스름한 빛으로 가득한 어스름 나라는 두 사람이 백합 줄기 아저씨의 집으로 가면서 색감이 완전히 바뀝니다. 노란 햇살 가득하고 연초록 빛깔 넘실대고 푸른 생명력으로 가득 한 백합 줄기 아저씨의 집. 그 환한 빛이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생일 선물로 받았던 낚싯대를 영영 못 쓰게 될까 봐 눈물 흘렸던 예란의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고 있어요. 다음에 낚시하러 오라는 아저씨의 말을 듣고 예란은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스름 나라로의 여행은 오늘 여기서 끝이 아닌 시작이에요.

하늘을 날면서 예란은 생각했어요.

어스름 녘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시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몰랐어요.

무엇이든 자유롭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아무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세상은 어린이의 세상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이 너무 힘들고 아프다고 내 안에서 울부짖는 어린이를 가만히 다독여 주는 어스름 나라는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친 어른에게도 가장 절실한 세상입니다.

“어스름 나라에서”“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49년 “Nils Karlsson-Pyssling” 제목의 단편 동화집에 함께 엮어 출판되었다 1994년에 단행본 그림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원작에서 ‘Liljonkvast’라는 이름을 가진 ‘백합 줄기 아저씨’는 린드그렌의 딸 카린이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해요. 이야기의 배경도 당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살던 스톡홀름의 한 아파트 근처 지역이라고 합니다.

글로 그려낸 아름다운 상상의 세상을 몽환적인 그림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녀의 어머니 리타 퇴른크비스트 베르슈어(Rita Törnqvist Verschuur)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번역가였다고 해요. 린드그렌의 문학 속에서 성장한 그녀는 아래와 같이 모두 여섯 권의 린드그렌 작품을 그림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 ) 안은 영문판 제목

  • 1989 När Bäckhultarn for till stan(A Calf for Christmas)
  • 1991 När Adam Engelbrekt blev tvärarg(The Day Adam Got Mad)
  • 1994 어스름 나라에서
  • 2003 Sunnanäng(The Red Bird)
  • 2006 Sagoresan(The Story Journey From Junedale to Nangilima)
  • 2019 Alla ska sova

낮과 밤이 만나는 짧은 시간의 틈 속에 펼쳐지는 환상의 나라를 강렬하면서도 아련하게 그려낸 그림책 “어스름 나라에서”, 스톡홀름 카를베리 거리, 성 클라라 교회의 첨탑, 크로노베리 공원의 사탕나무, 성 에릭 거리를 지나는 트램, 어스름 그 짧은 시간 세상을 맘껏 날아다닌 두 사람의 발자취를 상상해 봅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북유럽 하늘을 맘껏 날아봅니다.

이 선주

가온빛 대표 에디터, 그림책 강연 및 책놀이 프로그램 운영, "그림책과 놀아요" 저자(열린어린이, 2007), 블로그 "겨레한가온빛" 운영, 가온빛 Pinterest 운영 | seonju.lee@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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