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2021년 8월 25일에 발행한 <가온빛 레터 플러스> 12호 중에서 ‘작가 이야기’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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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작가는 경기도 여주의 나지막한 숲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가족 품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경험들은 작가의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에서 도자공예를 전공한 작가를 그림책의 세계로 인도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피노키오의 모험”(카를로 콜로디, 로베르토 인노첸티 / 비룡소 / 2010)입니다. 영국 여행중 들렀던 서점에서 이 책을 보게 된 후 언젠가는 자신도 그림책을 꼭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일러스트레이션 학교 HILLS에서 그림책과 일러스트레이션 공부를 하게 되었구요.

 

작품
  • 2013 돼지 이야기
  • 2015 대추 한 알(2015년 한국출판문화상)
  • 2017 수박이 먹고 싶으면
  • 2021 앙코르

첫 그림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의 그림책을 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2017년에 나온 “수박이 먹고 싶으면”입니다. 시원한 미숫가루 한 사발 들이키고 원두막 그늘에서 낮잠 자는 농부의 미소, 잘 익은 수박 한 통 들고 ‘어이! 이리들 오소!’하고 이웃들을 불러 모으는 농부의 손짓. 이 두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참고로 유리 작가 본인은 자신에게 가장 큰 배움을 안겨준 그림책으로 “대추 한 알”을 꼽았습니다. <그림책이 들려주는 자연과 생명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2018년 전북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그림책 원화전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는데, 네 번째 책 “앙코르”를 출간한 지금은 작가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해집니다.

 

다큐멘터리 그림책 작가

유리 작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림책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가’라는 표현이 가장 알맞지 않나 생각됩니다 “돼지 이야기”는 사회 고발 다큐, “대추 한 알”“수박이 먹고 싶으면”은 자연 다큐, “앙코르”는 인간 극장 정도?

진실 탐구에 대한 의지 또는 자연과 우리 이웃들에 대한 애정 없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삶의 다른 부분들을 포기한 채 담고자 하는 무언가에, 오로지 그 한 가지에만 쏟아 부어야 하는 열정과 긴 시간을 빼놓고는 다큐멘터리를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유리 작가의 그림책들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내놓은 그림책 어느 하나 오랜 시간 공들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수박의 일생이 봄에서 여름까지 몇 개월에 불과해서 “수박이 먹고 싶으면”은 다른 작품에 비해 수월했다고 말할 정도니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기획에 1년, 관찰하는데 1년, 작업에 또 1년, “대추 한 알” 그림책 한 권 만드는데 무려 3년이나 걸렸다는 유리 작가는 그림책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가입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유리 작가의 작품들 한 권 한 권 들여다보며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그리는 작가

유리 작가의 첫 그림책 “돼지 이야기”를 처음 본 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 눈을 감은 채 겨울밤 흩날리는 흰 눈에 젖어드는 돼지 한 마리, 이 책표지를 보며 그 안에 참혹함과 암담함이 담겨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돼지 이야기

돼지 이야기

글/그림 유리 | 이야기꽃
(2013/11/01)

돼지들에게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났지만
돼지들의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2010년 있었던 구제역 살처분 사태를 그린 이 책은 육식을 하는 우리의 식생활과 그것을 위해 사육되는 동물들의 복지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출발점입니다. 사육장의 열악하고 참혹한 풍경,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구제역이라는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수백만 마리의 돼지들을 살처분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포크레인에 떠밀려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지는 어미돼지와 새끼돼지. 시커먼 죽음 속으로 추락하는 그 순간에도 어미 품이 간절하기만 한 새끼돼지는 어미를 향한 눈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 새끼를 이 구덩이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사육틀과 번식틀에서의 삶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듯 아득한 저 위를 향한 어미돼지의 절박한 눈.

새끼돼지와 어미돼지의 무기력하다 못해 원망조차 품지 못한 눈빛을 마주한 독자들에게 작가는 말합니다.

사람도 동물이므로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생명을 길러 먹이로 삼는 능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옳은지 생각할 수 있는 힘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이 책이 그러한 생각을 나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날 이후 고기 섭취를 아주 많이 줄였습니다(그래도 일반적인 분들에 비해서는 아주 많이 먹는 거겠지만…). 그리고, 덜 먹는 대신 가격을 조금 더 주더라도 동물복지인증을 받은 고기와 달걀을 사먹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박연준 시인은 “돼지 이야기”에 감명받고 민음사에서 만드는 잡지 <Littor 릿터> 창간호(2016년 8월)에 “하늘에서 돼지들이 떨어지는 저녁”이란 시를 기고했습니다(시집 “베누스 푸디카”(창비, 2017)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삶을 바꾸기도 하고 또 다른 창작을 부추기기도 하는 것, 바로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유리 작가만의 힘입니다. 무언가가 잊혀지지 않도록 모두에게 알리고, 그래서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 이게 다큐멘터리의 본질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그려낸 유리 작가는 훌륭한 다큐멘터리 그림책 작가입니다.

 

자연의 소중함과 그 깊이를 그리는 작가

“대추 한 알”은 장석주 시인의 시를 그린 그림책입니다. 대추 한 알 품어낸 자연은 그 위대함을 노래한 시인의 시를 흡족해 했을 겁니다. 시인 또한 자신이 담아낸 그 자연에 대한 통찰의 깊이를 제대로 담아낸 이 그림책에 매우 만족했을 테구요.

대추 한 알
대추 한 알

시 장석주 | 그림 유리 | 이야기꽃
(2015/10/01)

삶은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나와 너, 소중한 가족과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때로는 포기와 좌절, 실패와 고통으로 얼룩지기도 하고, 때로는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처럼 기쁨과 희망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넘쳐나는 날도 있을 겁니다. 그러한 삶의 질곡을 견뎌내며 꿋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내 어머니의 삶이 아름다웠듯이, 내 아버지의 삶이 위대했듯이 우리의 삶도, 우리 아이들의 삶도 위대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 책을 그리고 만드는 긴 시간 속에서 유리 작가는 깨닫습니다. 대추 한 알에 담긴 우주의 의미를. 대추나무의 한 해 살이를 관찰하며 작가는 발견합니다. 대추나무의 변화무쌍함을, 그리고 대추나무를 둘러싼 자연과 이웃들을, 그들의 삶의 깊이와 세월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대추 한 알” 리뷰 보기

 

땀흘리는 기쁨 나눔의 즐거움을 그리는 작가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 무럭무럭 자라나는 수박,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 그리고 소중한 이웃들이 함께 하는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 앞서 내놓았던 두 권의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이 고뇌의 시간이었다면 이 책을 만드는 동안 작가는 내내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유리 작가와 글을 쓴 김장성 작가는 두 해 동안 실제로 수박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반려식물과 함께 지내는 분들이라면 잘 알겁니다.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고 잎과 줄기가 건강하게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 거기에 수확의 기쁨까지… 이걸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 만드는 동안 내내 즐거웠을 거라는 제 생각에 기꺼이 동의해주실 겁니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이 먹고 싶으면

글 김장성 | 그림 유리 | 이야기꽃
(2017/08/01)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씨를 심어야 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 싹을 틔워야 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 줄기를 키워야 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 열매를 맺혀야 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이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수박이 먹고 싶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커다란 손짓으로 불러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씨를 심어야 한다는, 수박이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 이야기 속에 우리 삶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저게 뭐 어렵냐며 고개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막상 살아보면 이대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조바심과 욕심 때문에 말입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거쳐야 할 것들 어느 하나라도 빠트리고는 제대로 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 과정들 속에서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을 놓쳐서는 우리 삶을 온전하게 지탱할 수 없는 법이구요.

따가운 여름볕 피해 원두막 그늘 아래 잠든 농부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주는 편안함, 설익은 수박을 노리는 고라니며 멧돼지며 고라니 같고 멧돼지 같은 꼬맹이들에게 골내지 않는 여유, 잘 익은 수박 한 덩이 따다 놓고 수박 먹고 싶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오라고 크게 손짓하는 넉넉함… 우리 어릴 적엔 이 모든 걸 몸으로 배웠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수박 먹고 싶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커다란 손짓으로 불러야 한다.
엊그제 다툰 사이도, 지나가는 길손도
이리 와요! 반가이 불러
정답게, 정답게 둘러앉아야 한다.
그래야 수박은, 잘 익은 수박은
칼도 닿기 전에 쩍! 제 몸을 열어
단물이 뚝뚝 듣는 붉은 속살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리뷰 보기

 

일상의 찬란함을 그리는 작가

“수박이 먹고 싶으면” 이후 4년만에 내놓은 “앙코르”는 우리 이웃들의 삶을 그린 그림책입니다. 마음 깊이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 하루 하루 자신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피어나는 은은하지만 찬란한 빛을 담아냈습니다. 그들의 묵묵하지만 치열한 분투에 건네는 따뜻한 응원입니다.

앙코르

앙코르

글/그림 유리 | 이야기꽃
(2021/07/20)

안단테 andante 걷는 듯 천천히
돌체 dolce 부드럽게
그라치오소 grazioso 우아하게
스피리토소 spiritoso 활기차게
콘브리오 con brio 생기 있게
콘아모레 con amore 사랑을 담아
다카포 da capo 처음으로 돌아가서

점점 더 크게.
다시 한 번 더.
앙코르!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떤 빠르기 어떤 느낌으로 연주되고 있나요? 걷는 듯 천천히? 활기차게? 어떤 속도 어떤 분위기건 상관 없으니 여러분 마음가는대로 여러분만의 속도로 편안하게 한 번 연주해보세요. 잘 안 풀리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구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찬찬히 연주하면서 막혔던 부분에선 조금 더 자신있게 연주한다면 틀림 없이 완주에 성공할 겁니다.

“앙코르” 리뷰 보기

 

점점 더 크게. 다시 한 번 더. 앙코르!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스튜디오에 4년간 머물러 있던 유리 작가의 시선은 이제 또 어디 어디를 두르고 둘러 어느 곳에서 멈추게 될까요? 유리 작가의 섬세하되 흔들림 없는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또 하나의 세상이 궁금해집니다.


※ 참고 기사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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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사랑
그림책사랑
2022/12/28 11:09

너무 좋은 글입니다.
읽는 내내 괜히 제 마음이 벅차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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