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2023년 2월 22일에 발행한 <가온빛 레터 플러스> 48호 중에서 ‘그림책으로 세상을 읽다’에 실렸던 글입니다. ‘그림책으로 세상을 읽다’는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그림책을 통해 들여다보며 독자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 <가온빛 레터 플러스>는 매월 둘째 넷째 수요일 밤 9시에 보내드리는 유료 레터입니다. 구독료는 월 5천원이며 3개월, 6개월, 12개월 단위로 구독 신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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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고 중지된 그림책

얼마 전 한 뉴스에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 “생각하는 ㄱㄴㄷ”이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가온빛에서도 “그림책으로 배우는 한글”이란 글에서 소개했던 그림책인데요. 문제가 된 그림책의 한 장면 먼저 보시죠.

생각하는 ㄱㄴㄷ

보도된 기사는 위 그림에서 우측 하단에 남자가 여자의 긴 머리를 잡아당기는 모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젠더폭력적이라는 이유로 한 모임에서 문제를 삼았고, 이 그림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전량 회수하고 필요한 조치를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기사입니다(기사 내용에는 출고 중지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월 20일에 알라딘에서는 여전히 이 그림책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 관련 기사
“여자 머리카락 잡고 웃는 남자 그림 무서워요”… 그림책 「생각하는 ㄱㄴㄷ」 출고 중지(베이비뉴스, 2023/02/08)

이 그림책의 초판은 2005년 4월 2일에 나왔습니다(제가 가지고 있는 그림책은 초판 10쇄로 2015년 3월 5일에 인쇄된 책입니다).

 

아빠는 깜둥이?

가온빛지기들이 좋아하는 김환영 작가의 작품 중에 “아빠는 깜둥이야”(김환영 / 보리 / 1991)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김환영 작가가 그렸고 출판사가 보리인 것만으로도 이 그림책은 무조건 좋은 그림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둥이’라는 단어로 인해 요즘 세대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이 ‘가치관 형성을 돕는 책’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아빠는 석탄을 캐려고 땅 속 깊이 들어가요.
어두운 땅 속에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해요.
저녁에 돌아온 아빠는 새까매요.
“아빠는 깜둥이야.”
내가 말하면 아빠는 웃으면서 나를 안아 주지요.

위에 인용한 글을 읽어 보면 인종 차별과는 무관한 그림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요즘엔 방금 제가 쓴 ‘인종 차별과는 무관한…’ 이 문장 조차 인종 차별적이라고 지탄 받을 겁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아빠에 대한 아이의 사랑이 가득 담긴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의 초판이 1991년에 나왔으니 53세인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출간되었네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그땐 아내를 만나러 가는 직행 버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던 시절이었습니다. 피부가 유난히 까만 친구에게 거부감 하나 없이 ‘니그로’라고 부르던 때죠.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랬다는 겁니다. 😞

 

돼지가 돼지고기를 넣고 만두를 빚는다고?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위 그림은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이억배, 채인선 / 재미마주 / 1998)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만두를 만들기 위해 재료 준비가 한창인데요. 내용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다 많이 들어가니
고기도 양껏 들어가야지.
암, 그렇고 말고!

만두에는 당연히 돼지고기 다진 게 들어가죠. 문제는 그림책 속에서 할머니와 함께 만두를 빚는 동물들 중에 돼지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걸 본 한 어린이 독자가 문제 제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억배 작가와 출판사는 고민 끝에 동족상잔의 참사를 막기 위해 ‘고기’를 ‘버섯’으로 바꿉니다.

참고로 제가 갖고 있는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는 3판 38쇄(2012년 10월 18일)입니다. 이것도 수정되기 전 버전입니다. 2016년에 진행된 이억배 작가 인터뷰(옆집에 사는 예술가)에 ‘고기’를 ‘버섯’으로 바꾼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2013~2016년 사이에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번외로 이 그림책에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한 곳 더 있습니다. 힌트는 바로 위 그림입니다. 20여 년 전에 제 딸아이가 문제 제기한 건데 과연 어떤 걸지 한 번 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벙어리 장갑?

달구지를 끌고

위 그림은 “달구지를 끌고”(바버러 쿠니, 도날드 홀 / 비룡소 / 1997)의 초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농부의 아내가 자아낸 털실을 가지고
농부의 딸이 짠 벙어리 장갑 다섯 켤레

인용한 위 문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난 <여덟 번째 가온빛 북클럽> 진행하면서 알았습니다. 저희가 갖고 있는 건 2009년 4월 17일에 나온 1판 27쇄인데 분명히 ‘농부의 딸이 짠 벙어리 장갑’이라고 나오죠. 북클럽 시간에 함께 읽으면서도 몰랐다가 참가자 중 한 분이 개정판에는 ‘벙어리’ 장갑이 아니라 ‘손모아’ 장갑이라고 나온다고 알려주셔서 그때서야 ‘벙어리 장갑’이란 말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벙어리 장갑 ×, 손모아 장갑 ○

참고로 엔젤스헤이븐이란 사회복지단체에서 2014년부터 장애인식개선 캠페인 ‘Let’s Change’를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프로젝트가 바로 ‘벙어리장갑’에 새 이름을 찾아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손모아장갑’이란 말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표준국어사전에 등재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달구지를 끌고”의 사례를 들며 그림책을 처음 만들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사회의 인식이 변화됨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를 먼저 살펴봤습니다.

다시 맨 처음 언급한 “생각하는 ㄱㄴㄷ” 관련 기사로 돌아가서 이 책에서 지적 받은 장면은 정말 이와 같은 문제에 해당하는 걸까요? 문제의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사에는 아래 그림에서 남자가 여자 머리를 잡아당기는 그림만을 확대해서 보도했습니다.

생각하는 ㄱㄴㄷ

마법사의 마술 지팡이가 마법을 걸면
ㅁ이 만들어진대요.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생각하는 ㄱㄴㄷ”은 단순히 ‘ㄱㄴㄷ’을 가르치는 그림책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글자와 생각, 글자와 상상을 연결 짓는 방법을 제시하며 아이들이 글을 깨우치며 동시에 생각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는 그림책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의 초성 기본 글자 ‘ㄱ ㄴ ㅁ ㅅ ㅇ’ 다섯 자를 발음기관의 모양을 토대로 만들었죠.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꼴을, 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꼴을, 입술소리 ‘ㅁ’은 입 모양을, 잇소리 ‘ㅅ’은 이의 모양을, 목소리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겁니다.

입 모양을 보고 만든 ‘ㅁ’에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한 가지 의미를 더합니다. 바로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관계’로 확장됩니다. 자 이제 위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마법사가 만들어낸 9개의 ‘ㅁ’들 각각이 품고 있는 만남과 관계가 보이시나요? 그중에서도 첫 번째와 마지막 아홉 번째의 ‘ㅁ’은 대비를 이루며 아이들을 자극합니다. 왜지? 어떤 만남이 더 좋은 거지? 어떤 관계가 나를 기분 좋게 하지? 누군가 나에게 저런 장난을 치거나 폭력적으로 굴면 난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누군가 나에게 친절하게 다가왔을 때 난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이런 질문과 거기에 대한 답을 어른과 아이, 아이와 아이,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주고 받으며 만남과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옳고 그름을 배우게 되는 겁니다.

기사에는 아래와 같은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2023년 2월 20일 현재 모두 11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모두 가져왔습니다. 맞춤법과 어법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댓글들 중에서 밑줄 친 댓글을 단 세 분 정도는 그나마 그림책이나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에 대해서 접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로 보입니다.

  • 출판전에 이상하단 걸 알았을텐데
  • 설명이 없어도 없는 사람도 느끼게 하는 것이 직관적인 그림이다. 잘못되고 틀렷다. 변병의 여지는 없다고.
  • 마 이게 현실이야
  • 아마 저런 장면도 보호자나 교사의 부연 설명과 함께 진행되길 바란게 아닐까 생각드는데..
  • 이보나흐미엘레프스카 예전 인터뷰 “세상은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거나 달콤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린이들도 아름다운 것과 함께 아픈 것, 슬픈 것도 알아야 합니다.”
  • 이보나흐미에레프스카 원래 철학동화 그리는분인데..유럽 동화들도 보면 무섭고 음침한것도 많은 데 이유가 무서움 같은 불편한 감정도 어린이들이 배우고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하기 때문이라고 어서 주워들음
  • 유아나 어린이들이 뭔가 알아가고 배워가면서 연상하게 될 때, 자기가 봤던 동화책의 장면을 상상한다. 그럼 이런 장면을 애들이 상상해야 되는가. 이거는 정서적인 학대와 폭력이라고 본다. 세종대왕님이 이런 식으로 ‘미음(ㅁ)’ 기억하라고 만드신게 아닐건데? 그리고 정말 ‘미음(ㅁ)’ 으로 연상되길 바래서 저딴걸 질문이라고 하냐? 저 작가가 독단으로 한거면 사이코패스고 정신병동 입원해야 된다. 아님 작가가 돈만 받고 시킨 놈이 따로 있고 그게 출판사 윗선이라서 저 질문도 한거면 이거는 이 출판사 폐업해야된다.
  • 와..무섭다 그림…사패같아요…
  •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 참 많네
  • 작가야..왜그랬니..
  • 미쳤다 정말

지금까지 논장이란 출판사가 내놓은 책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작품들 모두 살펴봐도 위와 같은 욕설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사 내용만 보면 출판사가 무조건적인 사과를 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출판사는 앞으로 이 문제를 놓고 작가와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게 아니라 반년만 지나도 못 보던 건물이 코 앞에 세워질 정도로 급변하는 시대니까요.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과 인식이 바뀌면 거기에 맞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함께 적응하고 변해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아닌 것까지 다 싸잡아서 획일적으로 바꾸라고 강요를 한다면 그게 맞는 걸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요?


※ 문제는 언론과 기자?

제가 봤을 때 이게 다 기자 탓입니다. ‘정치하는 엄마들’이란 모임과 출판사끼리 이 문제를 놓고 이야기 나눌 때만 해도 기사 내용처럼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기사가 나온 시점에도 해당 모임과 출판사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놓고 숙의 중일 수도 있고요. 경험상 기자들에게 던져 주면 애초에 내 손에 쥐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로 뒤바뀌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합니다.

2017년에 “앞으로 시공주니어 그림책은 소개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을 썼을 때 취재요청이 왔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우린 그렇게 하겠다는 것뿐이지 거창하게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 아니니 취재에 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단순히 전두환 일가만의 문제라면 불매운동 그 이상의 것도 하겠지만 작가들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여서 그들의 창작활동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 정도로 답하고 거절했습니다. 몇 차례 더 연락이 왔었는데 ‘이 사안이 아니어도 전두환 일가에 대해 취재하고 기사 쓸게 많지 않나?’라고 물은 뒤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2018년에 진구 설화의 잘못된 부분을 그대로 실은 책이 출간된 것을 보고 “책 만드는 이들의 책임”이란 글을 썼을 때에도 취재요청이 왔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땐 거절 이유를 댄 게 아니라 역으로 기자분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취재 목적이 무엇인가? 원작자들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취재에 응하겠다, 그런 목적으로 취재 요청한 거라면 어떤 식으로 진행할 건지 계획을 공유해 달라… 는 내용이었는데 답변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정치하는 엄마들’도 논장 출판사도 이 사안에 대해 같은 마음일 겁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취재가 되고 보도가 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아니라 3자인 기자 입장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쓴 기사 탓에 논장 출판사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가 매도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얘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네요. 😳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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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현
2023/04/07 08:54

공감합니다

배성심
배성심
2023/04/07 10:53

어제 생각하는 ㄱ,ㄴ,ㄷ 읽었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네요. ㅁ 만남, 어떤 만남이 좋은 만남일까? 라는 이야기를 아이와 나눠봐야겠습니다. 예전에는 맞고, 지금은 틀린다 라는 지점에서 아이와 책을 보면서 이야기나눌 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관점/글 감사합니다.

최미선
최미선
2023/04/13 16:23

공감하는 글입니다.

단, 시대를 읽어간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는 감수성이 둔한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너무도 다 방면에 감수성이 잘 발달 되어 있는 시대라 누군가의 눈에 그 그림책이 그렇게 보여져 그것이 공론화 되었다면 그 다음에 편찬 할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들은 시대를 읽어내는 그림으로 그려 낼 것이니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시대를 읽는다고 생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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