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침묵

거인의 침묵

(원제: Les Géants tombent en silence)
글/그림 바루 | 옮김 기지개 | 북극곰
(2023/04/05)


“거인의 침묵”은 한 마을에 서 있는 아주 커다란 나무의 회상록 같은 그림책입니다. 어린 묘목으로 이 마을에 처음 심어진 이후 조금씩 조금씩 나무가 자라는 동안 작은 공원과 놀이터가 하나둘 생겨나고, 아이들이 찾아와 매달리고,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아주 커다란 나무의 회상은 곧 이 마을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마을을 품었던 아주 커다란 나무의 회상은 고독합니다. 오래된 기억들은 그저 나무 혼자만의 것이고 마을과 사람들은 아무도 그 오랜 세월에 걸친 나무와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그림책을 보는 우리라도 아주 커다란 나무의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거인의 침묵

나무가 처음 마을에 오던 날의 풍경입니다. 시장님이 장황한 연설을 했고 온 마을 사람들이 관악대와 함께 나와 나무를 환영해 주었었죠.

거인의 침묵

저는 쑥쑥 자랐습니다.
마을도 함께 자랐지요.

나무가 쑥쑥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자 사람들은 그 옆에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죠. 흰머리 아줌마네 고양이 삐삐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다 내려오지 못해 소방관과 높다란 사다리차가 동원된 적도 있었고, 나무 아래서 밤새도록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이던 연인이 자기들의 이름과 하트를 나무에 새겨 놓은 적도 있었어요.

거인의 침묵

겨울이면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던 새들이 아주 커다란 나무에 내려 앉아 고단한 날개를 쉬어 가곤 했고,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나무 아래 모여 오색 빛깔 등을 켜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날이 밝을 때까지 즐겁게 춤을 추고, 가끔씩 시끌벅적한 시장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에 놀이터를 세울 때 왔었던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요란한 기계음들을 들으며 아주 커다란 나무는 작은 공원을 더 크게 키우려나 보다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거인의 침묵

게다가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거든요!
새들이…

아주 커다란 나무는 마을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존재였습니다. 마을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던 아주 커다란 나무는 더 이상 없습니다. 아주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던 자리엔 과연 무엇이 들어섰을까요?

오랜 세월 마을을 품어주던 아주 커다란 나무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던 새들이 잠시 머물 곳도 없고요. 마을엔 아주 커다란 나무를 기억하는 사람도, 마을의 역사를 아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저 빽빽하게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들과 그 안에 갇힌 사람들뿐입니다. 거인에게 침묵을 강요한 대가입니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던 나무가 개발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잊혀져 버리는 일은 우리나라에선 허다한 일입니다. 그 결과로 이웃과 아무런 소통 없이 살아가는 단절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책표지 그림에서 쓰러진 건 아주 커다란 나무가 아니라 마을입니다. 마을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아주 커다란 나무는 우뚝 서 있습니다. 마을이 똑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나무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는 바루 작가의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겠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소중히 여기자고, 우리를 품고 있는 자연을 조금 더 존중하자고, 개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대해서 잊지 말자고 말입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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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07:48

그 때는 몰랐거든요. 나무의 소중함도 살던 곳의 아늑함도. 세월이 지나고 문득 발견한 사진 속에서 그리움을 보고 찾아간 곳은 그때의 그곳이 아님이 아쉽고 답답했지요. 자본주의를 맹신하며 우리가 찾으려했던 건 부유함이었을까요. 책 소개 내용을 보니 예전의 그리움을, 지금 우리의 마음을 되짚어보게 됩니다.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이 선주
Editor
2023/06/06 22:38

문득 문득 돌아보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가 그래도 조금씩 멈추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건 아닌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돌아보게 될까요?
무엇이 가슴에 남아있게 될까요?

서 책
2023/06/02 08:41

고향 마을을 떠올리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먼저 생각납니다.
그만큼 크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겠지요.
쓰러지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나무가 쓰러지니 그 다음은 인간이 쓰러져요.
쓰러지는 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겠지요.

이 선주
Editor
2023/06/06 22:40
답글 to  서 책

저도 가끔 어린시절 올려다 보던 마을 느티나무가 생각이 나곤 해요.
아마도 서책님이 그리는 풍경과 제가 그리는 풍경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음에 남아있는 그 시절의 그림은 모두가 비슷한 것 같아요.

송림아해뜰작은도서관
송림아해뜰작은도서관
2023/06/02 12:59

제 일터 주변에는 소나무가 심겨 질 예정이에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나무들이 뽑혔고 톱에 잘려 트럭 위에 쌓여 있었는데..좀 언짢고 아팠어요.
뽑혀나간 나무들이 많이 놀랬을 것 같아요

이 선주
Editor
2023/06/06 22:44

가지치기 뭉텅뭉텅 할 때도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젓가락처럼 남아있는 걸 보면 저기서 잎이 나올까 싶은데 그래도 나무는 참 강인하다는 생각이.
생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송림아해뜰작은도서관님 이야기 들으니
얼마전 업데이트한 그림책 <소나무>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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