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그림, 책!]은 그림으로 그림책을 읽어보는 시간! 한 장 한 장 넘겨볼수록 그림이 주는 감동을 배가시켜 줄 새로운 형식의 그림책 이야기입니다. 그림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백슬기 객원 에디터의 톡톡 튀는 그림책 이야기에 푹 빠져 보세요!

※ 본 글의 저작권은 백슬기 객원 에디터에게 있으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할 수 없습니다.


아래 두 장의 그림은 『어떤 약속』(마리 도를레앙 / 재능교육 / 2019)과 『어두운 겨울밤에』(플로라 맥도넬 / 봄볕 / 2023) 두 권의 그림책에서 각각 한 장면씩 고른 겁니다. 두 그림 중 어느 쪽이 더 잘 그렸다고 느껴지나요?

어떤 약속
그림책 『어떤 약속』의 한 장면
어두운 겨울밤에
그림책 『어두운 겨울밤에』의 한 장면

그림은 취향의 영역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더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공통된 기준이 있는 듯합니다. 바로, 미술 학원 홍보물에서 볼 수 있는 연필 데생 그림인데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필 데생은 소묘라고도 하는데, 채색하지 않고 선의 농담만으로 빛과 어둠을 표현하고 입체감을 드러내는 그림을 말합니다. 소묘는 미술 학원에 다닌다면 가장 먼저 배우는 기법이면서 여전히 미대 입시 과목 중의 하나로 자리 잡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기법이 우리에게는 ‘그림을 더 잘 그린다’의 기준이 되는 듯합니다.

그럼 이렇게 보이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리는 기법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미술 양식은 당대의 문화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제품 출시일처럼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라는 화가이자 건축가가 큰 개념의 변화를 일으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럽 중세 시대 미술은 성경 내용을 상징하는 요소들의 나열이었지만, 14세기에 들어서는 점차 섬세하게 현실 그대로를 관찰해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관례적인 것에서 벗어나 관찰력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된 것이죠.

어찌 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이 700년 전 이탈리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미술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다르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상향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이전에 없던 새로움에서, 기존과 다름에서 빛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반 고흐, 피카소 등등 몇 세기 전에 살았던 예술가를 통해 현재의 우리가 감동 받는 이유이기도 하죠! 우월함이 아닌 새로움이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앞서 했던 “두 그림 중 어느 쪽이 더 잘 그렸다고 느껴지나요?”라는 질문보다는 “두 그림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나요?”라고 묻는 것이 다양한 생각을 나누기엔 더 좋은 질문 같습니다.

그럼 나에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 그림책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어떤 약속』『어두운 겨울밤에』 두 권의 그림책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볼수록 그림, 책! 어떤 약속, 어두운 겨울밤에

이 두 권의 그림책은 동일한 소재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밤에서 아침이 되는 시간의 흐름이죠. 하지만, 내용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약속』이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름밤의 산뜻하고 설레는 산책을 담았다면 『어두운 겨울밤에』는 작가가 경험한 우울증으로부터 회복되는 과정을 담다 보니 좀 더 깊고 어두운 밤을 다루고 있습니다. 표현 방식 또한 정반대의 스타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약속

『어떤 약속』은 새벽의 푸르스름한 색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대비되는 밝은 빛 표현으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장면들에 리듬감을 부여합니다. 또 연필로 얇고 세밀한 질감을 채우고, 그보다 더 진한 윤곽선을 이용해서 인물들과 배경을 어둠으로부터 분리해 냅니다. 이렇듯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 덕분에 독자들은 이 가족의 산책에 동행하는 느낌을 받게 되죠.

어두운 겨울밤에

사실 『어두운 겨울 밤에』『어떤 약속』에 비해 밝은 색깔의 가짓수도 많고, 밝게 표현한 장면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어두운 겨울 밤에』에서는 더 우중충하고, 칠흙 같은 밤을 느끼게 되는데요. 이는 재료와 구성의 역할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약속』은 훨씬 세밀한 묘사와 꽉 찬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푸르스름한 배경 덕분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단 하나로 인식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푸르스름한 어둠과 하얀빛 딱 2가지의 단조로운 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죠.

『어두운 겨울 밤에』의 경우 화면 구성과 묘사의 디테일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하지만, 유화와 오일파스텔이란 재료 덕분에 가벼운 묘사에도 진하고 깊은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또 거친 붓 자국 역시 단조로운 구성에, 역동성과 무게감을 더하죠. 만약 『어두운 겨울 밤에』 작가가 재료와 붓 터치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어떤 약속』처럼 세밀하게 묘사했다면 독자들은 괴로웠을 수도 있습니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너무 많은 디테일 때문에 그림책을 끝까지 읽는 데 과도한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림책 작가들이 그림책을 만들 때 표현 방식을 먼저 정하는지, 내용을 먼저 만드는지 궁금하실 수도 있는데요. 표현 방식은 작가만의 고유한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내용에 따라 표현에 변화를 주는 작가도 있고,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내용으로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도 있습니다.

마리 도를레앙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떤 약속』과 비슷한 그림체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플로라 맥도넬 작가의 경우에도 그림책은 아니지만 회화 작품들을 찾아 보면 역시나 『어두운 겨울밤에』와 같은 결의 그림들입니다. 두 작가 모두 자신의 고유한 그림체를 가지고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밤과 아침의 시간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더 잘 그린 그림’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용과 표현 방식이 이렇듯 찰떡처럼 붙어있다면 ‘잘 만든 그림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겨울에는 따뜻한 라떼가 생각나고 여름에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라떼가 더 잘 만들어진 커피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날에 먹고 싶은 것이죠. 물론, 누군가에겐 얼어 죽을 듯한 날씨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취향이 있을 수 있고요. 그림책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더 잘 그려진 그림이라서 찾아보는 것이 아닌, 오늘은 그저 『어떤 약속』과 함께 마음 산책을 하고 싶거나 『어두운 겨울밤에』가 주는 맛을 느껴보고 싶달까요?

여러분의 그림책 여정도 매일 색다르고 더욱 풍부해지기를 바랍니다!

백 슬기

침대맡에 그림책을 두는 사람.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며 살고 있고, 가온빛에서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림책이 사람들에게 꽤 힘을 주고, 퍽 기억에 남기를 소망합니다. | skpaik100@naver.com | 인터뷰 보기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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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수
홍선수
2024/01/25 02:07

늘 그림책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슬기님 글을 읽을 때 마다 재밌고 또 새로운 그림책을 선물받는 기분이 들어서 찾아보게 됩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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