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가온빛 그림책 수업> 참가자로부터 치매를 다룬 그림책들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메모해 두었던 책들 중에서 열 권을 추려서 보내드렸었는데요. 가온빛 독자들에게도 ‘치매(뇌인지저하증)를 다룬 그림책들’ 열 권 공유합니다.

‘치매(痴呆)’는 일본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를 그대로 우리가 가져와 쓰고 있는 명칭입니다. ‘어리석을 치(痴)’와 ‘어리석을 매(呆)’, 어리석다는 글자를 중첩해서 만들어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환자 본인과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이 말을 쓰는 것을 꺼려 할 수도 있게 만들어 조기진단과 치료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 병명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어감때문에 개정된 병명의 대표적인 사례는 ‘조현병'(2011년 이전까지는 ‘정신분열병’으로 부름)과 ‘뇌전증'(2014년 이전까지는 ‘간질’로 부름)입니다.

‘치매’를 대체할 용어로 가장 유력한 것은 ‘뇌인지저하증’이라고 하는군요. 음… 이 명칭도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저하’를 빼고 ‘뇌인지증’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좋아보이지 않나요?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

(원제 : Madame Cerise Et Le Trésor Des Pies Voleuses)
글/그림 상드라 푸아로 셰리프 | 옮김 문지영 | 한겨레아이들
(2015/04/03)

늘 소녀 같은 할머니 에드메 세리즈.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드니 세리즈.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은 오늘 소개하는 열 권의 그림책들 중에서 유일하게 치매에 걸린 부모 또는 조부모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애틋함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아내 에드메가 자신과 함께했던 기억들을 하나둘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드니 할아버지는 아내의 기억을 대신해 줄 멋진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서 선물합니다. 가족들 사진이나 소중한 추억, 중요한 정보들을 플랩북 형태로 곳곳에 담은 멋진 드레스. 에드메의 심장 위치엔 이런 글귀가 담겨 있습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으리
당신의 심장과 맞닿은 바로 거기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 리뷰 보기


나의 작은 아빠

나의 작은 아빠

(원제: Mon Petit Papa)
그림 장 줄리앙 | 글 다비드 칼리 | 옮김 윤경희 | 봄볕
(2023/04/03)

퇴행성 질환으로 인해 어린아이처럼 변해가는 아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런 아빠 곁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이야기를 아들의 시각에서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전하는 그림책입니다. 아빠를 목마 태운 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들의 시선은 아빠에게 가 있습니다. 앞으로 아들의 시선은 늘 아빠에게 고정되고, 발걸음은 언제나 아빠가 원하는 곳을 향하겠죠.

참고로 다비드 칼리의 자전적 요소가 담겨 있기도 한 이 그림책은 어머니가 노인성 치매에 걸려 돌봄이 필요 했던 시기에 간병을 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나의 작은 아빠』 리뷰 보기


마레에게 일어난 일

마레에게 일어난 일

(원제 : Mare En De Dingen)
그림 카쳐 퍼메이르 | 글 티너 모르티어르 | 옮김 신석순 | 보림
(발행 : 2011/12/09)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짝 친구 같았던 할머니가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꼬마 마레. 하지만 마레는 끝까지 할머니와의 소통을 포기하지 않아요. 할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애를 씁니다. 할머니가 자신에게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말이죠.

무엇보다도 그림이 아주 인상적인 그림책입니다. 글로 담아낼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그 무언가를 몽환적인 그림으로 시각화한 그림들은 드라마틱하고 아름답습니다. 아직 못 보셨다면 꼭 한 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마레에게 일어난 일』 리뷰 보기


밤의 숲에서

밤의 숲에서

글/그림 임효영 | 노란상상
(발행 : 2019/04/29)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궁금증과 상상, 그리고 이랬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그림책입니다. 남겨진 이에게나 떠나간 이에게나 이별이란 참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소중한 이에 대한 마음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내려 놓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합니다.

‘밤의 숲’은 치매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 마음까지 모두 잃어버린 할머니가 밤의 숲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고 온전히 ‘나’라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온갖 감정들이 마음 속에서 뒤엉킵니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던 ‘나 다운 나’가 아니라 태초의 것처럼 순수한 본연의 ‘나’일 겁니다.

『밤의 숲에서』 리뷰 보기


뺀드비치 할머니와 슈퍼 뽀뽀

뺀드비치 할머니와 슈퍼 뽀뽀

(원제 : Valle, mormor och vaniljsåsen)
그림 모아 호프 | 브리트 페루찌, 안 크리스틴 옌베리 | 옮김 신필균 | 사계절
(2009/11/30)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 에밀리아와 손자 발레의 다정한 사랑이 담뿍 느껴지는 그림책입니다. 제목의 ‘뺀드비치’는 ‘샌드위치’입니다. 에밀리아 할머니는 가끔 물건들의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거나 사용법을 몰라 애를 먹곤 하거든요. 하지만 손자 발레는 그런 할머니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이 아이 마음 속에서 피어 오릅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비록 기억을 잃기는 했지만 귀여운 손주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찐한 슈퍼 뽀뽀 해주는 건 결코 잊지 않았으니까요.

그림책 뒷부분에 작가 후기에 해당하는 글이 내용이 하도 좋아서 아래에 인용합니다.

에밀리아 할머니의 은빛 곱슬머리 밑에는 ‘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한테도 있는 것이지요. 뇌는 사람들이 말하고, 걷고, 먹는 걸 도와줍니다. 물론 머핀을 먹을 때도 그렇습니다. 뇌 속에는 동그란 모양의 뇌세포들이 많습니다. 꼭 진주 구슬처럼 생겼지요. 이 구슬들이 모든 행동을 관리해요. 이를 테면, 걸을 때 다리를 들거나, 머핀을 먹을 때 입을 벌리는 일들을 말이지요.

그런데 이따금 사람이 나이가 들면 뇌 속이 엉키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손자 이름을 잘못 부르거나 집 안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땐 뇌 속에 있는 몇몇 구슬이 병들었거나 아주 깨져 버린 겁니다.

노인들의 뇌는 망가진 진주 목걸이 같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건 아니고,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즐거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발레의 도움을 받는 에밀리아 할머니처럼 말이지요.

진주알이 한두 개, 혹은 여러 개 빠져도 여전히 목걸이는 예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요?

참고로 『뺀드비치 할머니와 슈퍼 뽀뽀』의 서문은 스웨덴의 실비아 왕비가 썼습니다. 실비아 왕비 역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았던 경험이 있어서 치매나 장애와 관련된 복지 사업에 관심이 깊었다고 합니다.


옥춘당

옥춘당

글/그림 고정순 | 길벗어린이
(2023/04/20)

‘순임아, 눈 감아 봐.’ 아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할아버지, 알고도 모르는 척 눈 감고 남편이 넣어주는 옥춘당 사탕을 가만히 입에 무는 할머니. 옥춘당처럼 달콤하고 동글동글한 두 분의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폐암으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치매를 앓기 시작합니다. 할머니는 하루종일 말없이 지내다 문득문득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할머니에게서 모든 말과 기억들이 빠져 나간 후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할아버지의 옥춘당처럼 동글동글한 사랑을 닮은 동그라미.

『옥춘당』 리뷰 보기


우리 가족입니다

우리 가족입니다

글/그림 이혜란 | 보림
(2005/10/15)

작은 중국집에 딸린 살림방에서 엄마 아빠와 사남매, 그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복작대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건 최근 일입니다. 할머니는 아빠가 어렸을 때 아빠를 버리고 떠났었대요.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자신이 버렸던 아들을 찾아온 할머니, 자신을 버렸던 할머니를 묵묵히 돌보는 아빠, 불평 한 마디 없이 그런 아빠의 곁을 지켜주는 엄마, 이해할 수 없는 이 가족의 구성을 바라보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물음표를 가진 채 성장하는 아이.

작가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책입니다. 그 기억 속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치매에 걸린 할머니로 인한 어린 소녀의 상처와 아빠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습니다. 묵묵히 할머니를 돌보는 엄마와 아빠를 통해 가족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가는 소녀의 힘겨운 성장 스토리와 함께 말이죠.

『우리 가족입니다』 리뷰 보기


우리 할머니는 달라요

우리 할머니는 달라요

(원제 : My Gran’s Different)
그림 캐롤라인 마젤 | 글 수 로슨 | 옮김 엄혜숙 | 봄봄
(2005/12/10)

아이가 낯설기만 한 할머니의 모습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 먹기까지의 과정을 잔잔한 수채화 그림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그림책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친구 할머니들과 달라요. 책가방만큼 큰 스펀지케이크를 만들어 주는 할머니도 있고, 꽃집을 하거나, 네덜란드에서 산 적이 있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여행을 하며 엽서를 보내주거나, 갤러리에서 그림 그리는 걸 가르치는 할머니도 있어요. 심지어 돌아가신 할머니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달라요. 돌아가시지도 않았고요. 친구들의 할머니는 어떠어떠하다고 말한 후 우리 할머니는 다르다는 말을 반복하던 화자인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할머니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할머니가 누구인지 내가 알고 있으니까요.

아이는 낯선 할머니의 모습에 처음엔 조금 놀랐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을 해주지 않는 할머니를 이해하려 애썼겠죠. 그리고 아이는 그런 할머니를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할머니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파랑 오리

파랑 오리

글/그림 릴리아 | 킨더랜드
(발행 : 2018/01/02)

“엄마, 이곳 기억해요? 엄마랑 나랑 처음 만났던 바로 그 파란 연못…” 이란 말로 시작해서 “나는 엄마의 아기였지만, 이제 엄마가 나의 아기예요. 내가 지켜 줄게요.” 라는 말로 끝나는 그림책 『파랑 오리』.

길을 잃어 울고 있는 아기 악어를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워준 파랑 오리. 아기 악어가 듬직(?)한 성인이 되고 나니 엄마 오리가 점점 늙고 쇠약해져 갑니다. 기억도 조금씩 지워져 악어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요. 이제 악어가 오리를 돌봐주어야 할 때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가는 과정을 가슴 찡하게 그려낸 그림책 『파랑 오리』는 치매를 소재로 했지만 그 이상의 깊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파랑 오리』 리뷰 보기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원제 : Josephina, een naam als een Piano)
그림 메이럴 아이케르만 | 글 야프 로번 | 옮김 최진영 | 고래뱃속
(2015/05/11)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주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사진을 따라 할머니의 지난 날을 회상함으로써 현재의 병약한 모습이 할머니의 전부가 아니라고, 할머니에게서 기억은 사라졌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의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거라고 말하는 그림책입니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할머니’예요.
‘요세피나 플로렌스’라는 이름도 있어요.

할머니들이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할머니가 되기 전에는 엄마였고, 아가씨였어요.
그 전엔 소녀, 어린이, 아기였고요.

아기였고, 소녀였고, 아가씨였던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죠.
할머니에게는 이미 오늘과 내일과 어제가 있으니까요.

나는 ‘할머니에게 나중이 없다’는 말은 믿지 않아요.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건 아니에요』 리뷰 보기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0 0 votes
Article Rating
알림
알림 설정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모든 댓글 보기
0
이 글 어땠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주세요!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