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씩스틴,
용맹스러운 계엄군 총이다.
절대 복종! 절대 충성!
임무를 완수하러 광장으로 간다.

특수 부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마친 후 집요한 정신 교육으로 언제든 빨갱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총입니다. M16, 씩스틴이 나의 이름입니다. 빨갱이들로 가득찬 광장에 지금 막 투입되었습니다.

광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길게 뻗은 총열 끝에 착검을 한 후 도망치는 폭도들을 골목 끝까지 악착같이 쫓아가 해치웠습니다. 폭도를 숨겨 주는 사람들도 거침없이 해치웠습니다. 무시무시한 공포 안에 저 폭도들을 가둬야만 다시는 거리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이만하면 됐겠지 싶었는데 저들의 숫자가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아니,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더 늘어나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빨갱이들에게서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벌어진 작전인데 시민들은 오히려 적의 편에 서서 우리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점점 더 초조해지자 총알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폭도들을 사살해도 좋다는 사령관의 명령과 함께. 금빛 찬란한 총알을 탄창 가득 채우고 나니 나도 모르게 든든해집니다. 폭도들을 향해 조준을 한 채 나는 마음 속으로 외칩니다.

계엄군은 나를 지키고, 나는 계엄군을 지킨다.

그리고 일제히 울린 총성의 끝으로 세차게 날아간 총알들은 사람들의 살 속을 파고들어 헤집어대기 시작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쏘았습니다.

‘민주주의 만세!’
깃발을 흔들며 몇 사람이 광장으로 뛰어나왔다.
다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문방구 아저씨가 쓰러졌다.
가구 공장 청년이 쓰러졌다.
교련복 입은 학생이 쓰러졌다.
나는 또 한 번 시민을 쏘았다.

쏘고 또 쏘지만 저들은 나의 폭력을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두렵지만 굴복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명 한 명 쓰러질 때마다 눈앞에 가득했던 폭도들은 간데 없고 사람들만 보입니다. 총알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 고꾸라진 사람에게서 깃발을 넘겨 받고 다시 또 달겨드는 사람들.

저들이 폭도가 맞긴 한 걸까? 혼란스러움으로 인한 초조함 속에 나는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쓰러진 수많은 피투성이들 사이로 제 친구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한 학생, 가늠자의 정중앙에 그 어린 학생의 얼굴을 정확히 가둔 후 숨을 깊이 들이마십니다. 방아쇠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려는 순간 따사로운 오월 햇살이 아스팔트에 고인 핏물 위로 쏟아지며 하얗게 반짝입니다.

“탕! 탕!”
나는 총알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더 이상 저들이 폭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저들을 향해 잔혹한 총알을 내뱉을 수도 없고, 엄혹한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는 나는 총구를 허공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씩스틴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부대는 일단 철수하기로 합니다. 그들과 함께 이 곳에 왔지만 여기서 다시 또 그들을 따라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광장에 가득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먹밥이나 음료수를 나눠주고, 시신들을 수습하거나 다친 사람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고 줄을 선 사람들… 그들 사이로 하얀 망울들이 하나둘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결심합니다.

이제
시민이 나를 지키고, 나는 시민을 지킨다.

나의 총부리가 자신들을 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받아주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들을 위한 총입니다. 시민들이 나를 지키고, 나는 시민을 지킬 겁니다.

나에게 5·18 광주는 하얀색이다. 아스팔트 바닥 핏물 위에 부서져 내리는 햇살,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이며 아른거리는 죽음의 하얀색이다. 오월의 광장 시민들 틈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생명과 희망의 하얀색이다. 씨앗을 품고 공중으로 나풀나풀 날아다니며 사람들 가슴속에 살며시 내려앉는 씨앗망울의 하얀색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국가가 휘두른 폭력의 도구였던 총 한자루에 그날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한 작가의 고민이 느껴지는 그림책, 폭력의 최전방에 나섰던 씩스틴의 저항과 자기고백을 통해 평화와 연대의 희망을 꿈꾸는 그림책 “씩스틴”입니다.


씩스틴

씩스틴

글/그림 권윤덕 | 평화를품은책
(발행 : 2019/04/15)

권윤덕 작가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다룬 “꽃할머니”, 제주 4·3을 담은 “나무 도장”에 이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씩스틴”을 내놓았습니다. ‘국가폭력 3부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싶다가 기분이 씁쓸해지고 말았습니다. 국가폭력 시리즈가 3부작으로 끝나기 힘들만큼 아무 죄 없는 시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일들이 우리 근현대사에 너무 많아서…

용서는 가해자에 대한 완전한 처벌과 진심 어린 사과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화합이라는 미명 하에 사죄와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어쩌면 “씩스틴”의 씨앗망울은 작가의 감성적 견해의 산물이자 섣부른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자들 중 가해자이면서 그 역시 피해자였을 수도 있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 날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연대를 꿈꾸는 희망을 싹틔우고자 한 작가의 바람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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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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