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2022년 7월 27일에 발행한 <가온빛 레터 플러스> 34호 중에서 ‘작가 이야기’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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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6월에 소개했었던 권정생 선생님의 “복사꽃 외딴집”의 그림을 그린 이가 바로 오늘 소개할 김종숙 작가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을 김환영 작가만큼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낯선 이름의 작가가 그린 그림에 푹 빠져서 ‘누구지?’ 하며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속초여고, 강원대 미대 졸업이라는 학력이 말해주듯 속초에 뿌리를 내리고 산 김종숙 작가의 그림 속에는 속초가 가득합니다. 덕장에서, 항구에서, 난전에서 소박하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펄떡이거나 맞좋게 말려지는 생선들이 김종숙 작가가 그리는 소재들입니다. 그 그림들을 통해 그녀가 담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꾸밈 없는 본연의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공원에서 잠든 노숙자의 가려진 얼굴과 드러난 손을 그린 ‘공원’이라는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공원’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저 바닥 밑에서부터 저 높고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사는 모습은 저마다 다를지언정 인간의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래서 김종숙 작가의 그림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마음이 차분하고 겸손해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복사꽃 외딴집”에서 작가의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입니다.

2015년 기사에 50세라고 보도가 되었으니 올해 우리 나이로 57~59세 가량인 김종숙 작가는 그저 혼자 묵묵히 그림을 그리다 늦깎이 데뷔를 했습니다. 홀로 육아와 생계를 책임져야 해서 덕장, 항구, 식당 등등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그 돈을 또 아끼고 아껴서 그림 그릴 물감을 샀다고 하니 그간 작가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까요.

친구의 그림들이 하도 좋아서 여고 동창생 둘이 작가 몰래 그림 두어 점 가지고 서울 인사동에 가서 전시를 열어줄 사람을 찾아다니다 만난 것이 평론가이자 시인인 박인식씨였다고 합니다. 그가 기획을 맡았고 인사동 아라아트센터도 선뜻 수락했지만 정작 김종숙 작가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고 하네요. 그런 상황을 알고 두 권의 책을 냈던 낮은산 출판사 대표도 강권하는 등 작가를 아끼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조르고 또 졸라서 가까스로 결심하고 연 첫 개인전이 50세가 되던 2015년에 열린 ‘속초다’라는 전시였다고 합니다.

재미난 건 이때 전시했던 50여 점의 작품이 모두 팔리자 작가는 무척 아쉬워했다는 사실. 자신이 아끼는 그림을 더 볼 수 없게 된 탓이었을까요? 그 다음 전시회에서 작가는 몇몇 작품들에 ‘판매예약’이란 딱지를 붙여두었다가 자기 집으로 도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김종숙 작가가 어떤 심성을 지니고 어떤 가치를 좇으며 살아가는지 느낌이 오시죠? 😄

김종숙 작가의 그림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회화 본령에 충실한 그림’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미술관에 처음 갔던 날 어떤 그림을 보고 어떤 감동을 받았었나요?  저는 작가도 제목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엄청 크고 거친 질감으로 켜켜이 덧칠한 물감 속에 사람들이 꿈틀대는 것만 같았던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이란 게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고 영화보다 더 생동감 넘칠 수 있구나! 이런 느낌을 처음 받았던 그림… 이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최소한 열댓 걸음을 걸어야 될 만큼 엄청 크고 강렬했던 그림이었습니다. 김종숙 작가의 그림이 풍기는 느낌이 꼭 그렇습니다. 어떠한 변칙이나 테크닉을 가미하지 않은 정직하고 순수한 그림.

속초에서 오랜 시간 은둔(?)하며 지냈기에 그림책은 아직 “복사꽃 외딴집” 한 권뿐입니다. 그 외에 네 권의 동화책에 삽화를 그렸는데 한 권은 권정생 선생님의 “복사꽃 외딴집”이라는 단편 동화집이고, 나머지 두 권은 속초에서 ‘글과 그림’이라는 동인에서 함께 활동하는 박기범 작가가 쓴 단편 동화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길러지지 않는다”(탁동철, 낮은산, 2023)라는 동화책에서도 김종숙 작가의 그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동화책도 좋지만 앞으로 그림책 작업을 더 많이 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미친개

미친개

그림 김종숙 | 글 박기범 | 낮은산
(2008/02/15)

너와 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덤빌 테면 덤벼 봐라.
내가 찾은 먹을 것을 양보할 수는 없다.

폭우 덕분에 식용 개 사육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강아지 한 마리. 마을 구석에 숨어 지내며 천덕꾸러기처럼 자라던 강아지는 사람들의 돌팔매질을 피해 숲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버린 음식쓰레기로 살아가던 마을보다는 먹이 구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숲의 삶에 적응하며 강아지는 자신의 영역을 지닌 한 마리 개로 성장합니다.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을 무렵 개는 또 다시 사람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위험한 개, 미친 개로 몰린 채 산골 사람들의 몽둥이질과 사냥꾼들의 총부리에 내몰린 개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읽다보면 이게 개의 이야기인지 나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을 직면합니다.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김종숙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자신을 발견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형체가 있는 듯 없는 듯 투박하게 그린 개의 모습들에서 힘겨운 현실의 무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삶이 느껴집니다.


그 꿈들

그 꿈들

그림 김종숙 | 글 박기범 | 낮은산
(2014/08/10)

지금 팔레스타인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았나요? 그때 이라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요?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아파요.

– 김종숙 작가 후기 중에서

글을 쓴 박기범 작가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 소속으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인간방패로 전쟁터에서 현지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데 애를 썼던 평화지킴이 활동가였다고 합니다. 철저히 평범하게 살아온 저로서는 이런 이력을 보게 되면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보다 ‘참 대단하구나!’란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 꿈들”은 그때 작가가 경험했던 전쟁의 참상, 만나고 보았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과 느낌들을 기록한 동화책입니다. 여기에 김종숙 작가가 일 년간 그린 서른일곱 점의 유화 그림이 더해져서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같은 화가가 그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꿈들” 속에 나오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담긴 평화와 화폭에 담긴 속초 사람들의 얼굴과 손에 담긴 소박함이 참 많이 닮았습니다.

2019년 고성 산불로 작가의 집이 전소되면서 작가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과 드로잉이나 스케치들도 함께 불타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꿈들”의 원화도 이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김종숙 작가가 평소 꼭 한 번 그들을 찾아가서 그림의 진짜 주인들에게 그림을 돌려주고 싶어했었다고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사꽃 외딴집

복사꽃 외딴집

글 권정생 | 그림 김종숙 | 단비
(2022/05/10)

아이들은 아무나 따 먹어도 좋음.
다만 한 사람이 한 번에 꼭 한 개씩만 딸 것.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아름답게 그려낸 권정생 선생님의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건 거침없이 그려낸 김종숙 작가의 그림입니다. 묵직하면서도 화사하고 아름답게, 한껏 유쾌하면서도 짜르르 그리움이 뼛속까지 사무치게 밀려오도록 그린, 춤추듯 연주하듯 혼을 실어 그린 그림들… 넘기고 넘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넘기고 수십 번을 되풀이하며 김종숙 작가의 그림을 감상해 보았습니다. 그림으로 건네는 위로가 따뜻합니다.

태식이, 용갑이, 진복이, 정수, 돌이 그 정겨운 이름을 부르며 “복사꽃 외딴집” 그림책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봅니다. 한때 외딴집 가득했던 사랑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진짜 어른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복사꽃 외딴집” 리뷰 보기


※  시인이 소개한 김종숙 화가

김종숙 화가의 첫 개인전을 기획한 박인식 평론가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김종숙 화가를 소개하기 위해 쓴 시 ‘속초다’가 참 멋드러져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속초다

박인식

속초行!
길가 간판이 막국수막국수막국수막국수 일색이면 홍천,
그게 황태황태황태황태로 바뀌면 벌써 원통.
미시령을 뚫고지나 동해를 내려다보는 사이 물회물회물회물회 세상이 나타나면
당신은 속초라는 ‘중독의 땅’에 닿는다.
바로 여기 펼쳐진 김종숙의 그림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당신마저 그 속에서, 법으로도 금하지 못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어떤 끌림에 중독되면 어떡할거나.
나도 중독! 너도 중독!
우리는 이미 속초다!

이 인호

에디터, 가온빛 레터, 가온빛 레터 플러스 담당 | ino@gaonbi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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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책
서 책
2023/04/28 07:54

서사가 있는 삶이 서사가 담긴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깊이 성찰 하는 시간을 가지며 글을 읽습니다.
화가가 그린 삽화가 있는 책들을 다 사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이 선주
Editor
2023/05/08 10:38
답글 to  서 책

아, 김종숙 작가 그림에는 영혼이 담겨있는 느낌이에요.
그림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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